2016년 말라기 제2강(1.31)
언약을 지키라
말씀/말라기 2:1-16
요절/말라기 2: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지난 말라기 1장에서는 선택적 사랑에 기초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제사장들의 죄를 살펴보았습니다. 제사장들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니 그들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은 엉망이었습니다.
오늘 2장에서는 계속해서 제사장들의 죄와 일반 백성들의 죄를 말합니다. 제사장들의 죄는 말씀에 대한 자세의 문제이고, 백성들의 죄는 정욕의 문제였습니다. 이 두 죄의 공통점은 언약을 신실히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라기의 큰 주제는 어떠한 상황이든 `언약에 충실하라`입니다. 가다가 상황이 바뀌고 현실은 기대만큼 되지 않더라도 처음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 제사장들은 무슨 언약을 깨트렸습니까? 또한 일반 백성들은 어떠한 언약을 깨트렸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언약에 신실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레위와 세운 언약을 깨트린 제사장들(1-9)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최후 통첩식의 강한 명령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명령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먼저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는 부분을 보면, 제사장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축복을 받았습니까?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직분으로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그들이 입는 온갖 화려하고 거룩하고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을 통해 그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도록 했습니다(출28:5). 그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며, 보배로운 말씀을 맡아 가르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제사와 중보기도를 통해 백성들의 무거운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직분인 만큼, 가장 고귀한 직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기업을 얻는 축복도 있습니다. 나아가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축복하는 자리입니다. 민6:24-26절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위해 빌어줄 축복의 말씀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한마디로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의 연결고리로서 막중한 직분을 맡은 자들입니다. 제사장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백성의 성패, 더 나아가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기도 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제사장은 백성들의 영적 스승이자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주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에는 이런 축복된 자리,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 있는 제사장들이 축복대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라 말씀하시며, 저주를 기정사실화하셨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축복 대신 저주를 받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a).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솨마로서 단순히 듣는데서 더 나아가 `경청하다(listen to), 순종하다(obey)`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 `마음에 두다`는 것은 사랑하는 연인을 마음에 품듯이,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 말씀에 대한 자세가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존경하거나 사랑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분의 말을 깊이 새겨듣고 가슴에 품습니다. 나아가 순종하며 따르고자 애를 씁니다. 그럴 때 그 분이 영화롭게 됩니다.
이처럼 제사장들은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마음에 품으며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란 말이 무색하게 말씀을 듣지도, 마음에 두지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물질적인 번영과 탐심, 그리고 지상에서의 성공과 자신들의 영광뿐이었습니다. 이런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전혀 영화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도, 공경하지도 않았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말씀을 귀히 여기지도 순종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비단 자신들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영향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도 미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말씀을 사랑하지도, 귀히 여기지도, 순종하지도 않자 백성들도 그대로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 시대는 하나님의 도가 땅에 떨어지고, 공의와 정의가 실종되면서 각종 부도덕한 죄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사장들이 말씀을 귀히 여기고 순종치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십니다. 백성들에게는 악영향을 끼쳐서 죄 가운데 빠트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흥왕히 일어나는 시대를 보면, 한결같이 말씀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순종하는 시대였습니다. 한국의 오순절이라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은 강력한 회개가 지속되는 큰 성령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부흥이 가능하게 된 것은 당시 얼마 안 되는 초기 성도들의 기도와 더불어 뜨거운 말씀 사랑에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어머니들은 전라도에서 자신이 먹을 일주일치 내지는 보름 양식을 머리에 이고 평양까지 걸어가서 말씀 사경회를 섬겼습니다.
말라기 시대가 가장 어둡고 영육간에 궁핍하며 황폐화된 시대가 된 것은 최첨단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의 말씀을 경외하지 않는 죄악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이미 저주하여 축복이 저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게 됩니까?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라기는 듣기 거북한 과격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랑하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절기의 희생의 똥`은 절기 때 바쳐지는 희생제물의 똥을 말합니다. 동물제사를 드릴 때, 피는 제단에 뿌리고 가장 좋은 것, 예를 들면 기름과 살코기는 번제로 태워 드리고, 가죽과 똥은 진 밖으로 내어다가 불태웠습니다.
이처럼 똥은 의식법상 매우 부정한 것으로, 이를 얼굴에 바른다는 것은 그들의 불결한 죄악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극단적인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을 말합니다. 똥은 사실 위생적으로도 매우 불결하고 더럽습니다. 길 가다가도 똥을 보면 모두 피해가지, 똥을 사랑해서 정면으로 가서 사뿐히 즈려 밟고 가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똥을 얼굴에 바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수치이며 모욕입니까? 이렇게 똥칠을 당할 뿐만 아니라, 똥과 함께 제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에게 이러한 형벌이 주어집니까? 말씀을 귀히 여겨 귀담아 듣지도 않고, 마음에 두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들을 보며 우리의 말씀에 대한 마음의 자세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모임은 비교적 말씀공부를 많이 하는 모임입니다. 인격적인 일대일부터 GBS까지 주로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나눕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보다 말씀을 잘 알고, 말씀에 거하며, 순종할 수 있는 분위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말씀에 젖어 있다보니 경외심이 부족하고 타성에 젖어서 살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이 귀한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말씀 공부에도 잘 안 나오고, 준비공부도 안 해오고, 어떤 분은 높은 IQ를 자랑하는 것인지 한마디도 받아 적지 않습니다. 더욱 말씀을 마음에 두고 순종하고자 하는 투쟁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 따로, 생활 따로 따로국밥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집니다. 이런 자들이나 모임은 결국 본문에 의하면 똥칠을 당하고 제하여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저부터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새롭게 하지 않거나 그런 자들을 방조한다면 결국 똥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않고, 말씀공부에도 안 나오고,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이나 신앙스타일에 고집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곡된 생각인데도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저주가 축복이 되는 삶의 비결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시대를 섬기는 제사장들로서 어떠한 경우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겨 마음에 두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읽고 묵상하며, 정성껏 소감을 써서 말씀을 마음에 두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한 삶을 살아갑니다(시1:3). 또한 이 시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
4-9절은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기억하며 바람직한 제사장상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듣기에 거북한 심한 명령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항상 있게 한다`는 것은 후대 제사장들도 이를 기억하고 순종해야 할 언약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레위와 세운 언약은 무엇입니까?
5,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을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레위와 세운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었습니다(민25:13). 이는 레위 자손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삶을 살 때 생명과 평강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 언약에 따라 초기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 곧 말씀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습니다.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제사장으로서 가장 고귀한 일인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초기 제사장들이 말씀에 기초한 건강한 제사장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생명과 평강의 삶이 찾아왔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영육간에 건강하고, 전쟁이나 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역사적으로 통일 제사장 나라를 이룬 다윗 왕의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라기 시대는 제사장이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생명과 평강의 언약은 깨지고, 이스라엘은 축복은커녕 무기력하고 병들어 바사를 비롯한 주변 이방나라들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7,8절은 이러한 깨어진 언약 상황을 잘 말해줍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제사장의 입술은 어떤 경우에도 지식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이 지식은 세상 지식이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을 아는 지식입니다. 제사장이 이런 영적인 지식으로 충만할 때,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러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 제사장들은 영적인 지식보다 쓰레기 같은 세상 지식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지식은 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는가와 같은 지식, 주가에 대한 지식,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잔재미를 더욱 즐길 수 있는가 하는 지식으로 충만했습니다. 이런 말씀이 없는 그들에게 그 시대 사람들이 율법을 구하러 나아올 리가 만무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그들로 인해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이 옳은 길에서 떠나 율법을 거스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에게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들 제사장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길을 지키지 않았습니다(9a). 율법을 행할 때에도 사람에 따라 치우쳐 율법을 불공평하게 적용했습니다. 이런 레위의 언약을 깨트린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제사장만이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그 시대 온 나라와 백성들 전체가 황폐해지고 병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말라기서의 온갖 병폐와 두려운 현상들은 하나님께서 버려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모두 제사장들이 말씀을 멸시함으로 레위와 맺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깨트린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의 불행의 시작은 하나님께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레위와 세운 언약을 지키지 않은 인간 제사장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무엇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특히 말씀을 맡은 제사장들이 대오각성하고 말씀을 귀히 여겨 귀담아 들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두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레위와 맺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 다시 부활하여 이스라엘은 영육간에 번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헝클어진 부분들이 바로 잡아지고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맡은 이 시대 제사장들인 우리가 말씀에 대한 자세부터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귀히 여겨 무엇보다 말씀을 사모하여 나아오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16년 한 해 말씀에 대한 자세를 새롭게 하는 가운데, 레위와 맺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 우리 안에서 크게 성취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Ⅱ. 아내와의 약속을 깨트린 유대 백성들(10-16)
이 부분에서는 유대 백성들의 죄악 중 주로 형제들의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부터 밝힙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아버지, 한 하나님에게서 나온 한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거짓을 행하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에게 거짓을 행했다`는 것은 형제애를 상실하고 배신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거짓`이란 단어는 주로 부도덕한 상거래나 혼인관계의 부정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분문에는 `거짓을 행했다`는 단어가 10,11,14,15,16절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서로를 배신하고, 아내를 배신하고, 남편을 배신했습니다. 그 사회는 공동체 정신을 상실하고, 형제사랑과 부부사랑을 상실하고 서로에게 배신을 때렸습니다.
유다의 죄악 중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여기서 `거짓을 행하고, 가증한 일을 행하며, 성결(성소)을 욕되게 한 것`은 모두 유다가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한 죄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방 신의 딸이란 이방 신을 섬기는 딸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여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방여인과의 결혼의 위험성을 아시고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이방여인과의 결혼이 불가함을 말씀하셨습니다(출34:16, 신7:1-4). 이들과 결혼이 불가한 것은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역자의 영향을 받을 터인데,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이방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는 이런 율법이 다 무너졌기에, 이방 신의 딸들과 결혼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동시대의 말씀인 느헤미야 13:23-28절에 보면, 백성 중 이방여인과 결혼한 자들로 유력한 유대 백성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의 아들까지도 이방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이들 이방여인과 결혼한 자녀들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자녀가 이방나라인 아스돗 방언은 절반쯤 하여도 유다 방언인 히브리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언어뿐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이들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몇 사람은 때리고, 몇 사람은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고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나라를 말아먹은 솔로몬 왕의 예를 들어 다시 교육을 시켰습니다.
유대인의 자녀교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1948년 긴 유랑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누가 유대인인가?` 그 정체성을 결정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이방인이어도 어머니가 유대인인 경우 유대인으로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만큼 자녀 교육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절대적으로 본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자녀교육에 열심입니다.
EBS취재한 유대인의 교육 편을 보았는데,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주로 히브리어와 율법인 토라를 가르치고, 아버지는 퇴근하여 잠자기 전에 책을 많이 읽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잠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의 집중력과 상상력이 높아지고, 평온함을 주어서 효과만점의 교육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축복 기도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역할은 얼마든지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입니다. 이들 가정에는 TV가 없고, 책장에는 책만이 가득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차분한 가운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지혜로운 아이로 성장하는 데에는, 이런 조기교육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믿음을 가지고 자녀교육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어릴 때부터 교육하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에 이방여인이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신앙을 비롯한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위험성을 알면서도 왜 이방여인과 결혼을 했을까요? 그것은 이방여인과 결혼함으로 경제적 유익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재산을 가진 부유층이었는데, 돌아온 후 그 땅의 지배계층인 이방여인들과의 잡혼을 통해 다시 재산을 얻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방 신의 딸들과의 결혼을 물질신과의 결혼으로 보기도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과 이혼하고 물질이란 이방신과 결혼한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행함으로 결혼 언약을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모두 그 후손을 끊어버리시겠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유다의 죄악은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도 행했습니다.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는 죄악이었습니다(13a). 이는 이들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데서 오는 아내와 자녀들의 눈물과 울음과 탄식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는 다시는 이들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이들의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어찜이니이까? why”하며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이로 볼 때 부부간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침을 알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싸우고, 상대방의 눈에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게 하고, 탄식 소리를 내게 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봉헌물은 받지도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들이 드리는 예배는 무효이고, 헌금도 무효이고, 기도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형제와 싸우고 와서 드리는 예배는 무효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5:23,24).
하나님께서 왜 이 부분을 엄히 다루는 것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결혼의 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 볼 때 결혼은 아내와 남편 양 당사자 간의 문제만이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3자간의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혼을 하거나 상대방을 혹독히 대하는 것은 결혼의 서약을 위반하는 일로서, 증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또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는 의미에는 이혼뿐만 아니라 동역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 나아가 동역자에게 마음으로라도 거짓을 행하는 것 모두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에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15,16절은 하나님은 영이 충만하여 많은 사람을 만들 수 있지만, 오직 하나인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 한 사람씩만 만드신 이유는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들은 심령을 삼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곧 조강지처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아내를 학대해놓고 옷으로 그 학대의 상처를 가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크나 큰 죄악입니다.
부부관계는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분명한 결혼진리 위에 실제적으로 살아가면서 부부 모두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번 주에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각각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이벤트 하나를 열어주어서 가정교회에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가정교회가 견고해질 때 더욱 힘있게 하나님의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난주에는 성대 학부 게시판에 2월 15,16일 대계열 오리엔테이선을 안내하면서 새내기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문구가 떴습니다. 8번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8.기타: 이동간 행사진행 도움을 주는 FG(Freshmen Guide)학생(청색 점퍼 착용 예정) 이외의 기타 사행성, 종교적 목적을 띤 학생 또는 외부단체에 의한 설문조사 등에 응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가장 고귀한 일을 사행성 사업과 동일하게 취급당하는 죄악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학교 당국과 인본적인 선배들, 또 수위 아저씨들의 눈치를 보며 새내기를 새롭게 피싱하는 일은 거대한 골리앗과 싸움을 벌이는 것 같은데, 더욱 움츠러드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설문지 외에 전도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제가 기도제목을 알려야 할 것 같아 같은 성대를 섬기는 대학로UBF 이요셉 목자님과 종로1부 UBF 김갈렙 목자님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더니 갈렙목자로부터 이런 문자가 왔습니다. “골리앗이 세고 크지만 그래도 이마가 열려 있다는...믿음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마가 커 보이겠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명륜동에도 기숙사들이 생겨서 기숙사 앞에서 피싱을 시도하고 있다고, 토요일에는 양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매주 나누어 주며 양들을 초청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대뿐 아니라 요즈음 서울대도 전도를 할라치면 멘토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메가폰을 들고 경고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전도하는 UBF목자를 “전도충”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갈수록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미 몇 대학은 공식적으로 복음 전하는 것을 금하고 학생이 신고하면 폴리스가 떠서 내쫓습니다. 그러나 연구하며 도전하는 믿음이 있는 목자들에게는 길이 보이고, 또 길이 열릴 것을 믿습니다. 그런 중에도 복음역사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올 해 대부분 요절은 사2:3절로 잡은 줄로 압니다. 우리 각자가 말씀의 시온산이 되어 양들이 몰려오리라는 비전입니다. 그러니까 올해는 이 말씀처럼 우리 각자가 말씀의 시온산이 되고, 양들이 몰려오는 구도로 패러다임쉬프트를 이루고 섬겨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피싱도 꾸준히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새롭게 텐스탭 바인더를 연구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빼어난 말씀의 종으로 성장해가야겠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텐스탭은 2007년 버전으로 일부는 맞지 않고, 풀이도 보완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빛과 운명은 빼고, 대신 창세기 1장을 한 강 집어넣어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또 양들에게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풀이집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새롭게 준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골리앗을 때려눕힌 다윗의 비장의 무기는 물맷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방의 물맷돌이 날아가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절명하기까지는 그냥 되지 않았습니다. 평소 다윗이 피나는 물맷돌 훈련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말씀의 물맷돌 훈련은 더욱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말씀의 칼은 많이 무디어지고 녹슬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날카로운 칼, 마광한 화살 같은 말씀의 종이라고 했습니다(사49:2). 우리가 이 시대 캠퍼스를 섬기는 제사장들로서 지성인들을 섬길만한 날이 선 말씀을 소유한 자들로 준비되어지는 2월 한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언약에 신실한 자들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나의 형편이 어렵다고, 상황이 달라졌다고 신실함을 잃어버리고 상대적으로 섬기는 것은 또 다른 큰 죄를 낳는 커다란 비극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나 신실한 종들이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소망스런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