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가을학기 요한계시록 제 2 강(10.4)
인자 같은 이
말씀/요한계시록 1:9-20
요절/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시록 말씀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독론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해석도 예수님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 예로 계시록에는 어린 양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어린 양도 일찍 죽임을 당한 비참한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전하면서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어린 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 양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 곧 교회가 죽고 희생하고 섬기는 어린 양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가장 잘 나와 있는 것은 물론 복음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9).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자체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을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병 고침의 은혜를 통해서 건강한 새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귀신들려 울부짖는 수많은 영혼들을 권능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많은 양떼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중노동에 가까운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종국에는 죄인들을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이를 통해 구원의 새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서 큰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인자`라는 단어를 통해 나타내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러나 이러한 인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한계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육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인자로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첫 번 제자이자 수제자 그룹으로,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보고 체험하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는 아기처럼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식사를 하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육신을 입으신 인자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아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본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생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요한 자신도 처음에 이 분이 누구인가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공생애 기간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언뜻 보였습니다. 그래서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인자 같은 이`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본래적인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인자 같은 이의 느낌을 갖게 했지만, 그 실제 모습은 너무나 놀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오늘 이 말씀이 당시 1세기 성도들과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시간 역사의 대주재자이신 본래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잘 알고, 그 앞에서 확신 가운데 힘있는 제자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9-11)
먼저 편지의 발신자인 사도 요한은 현재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짤막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에는 사도 요한이 그동안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를 한마디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먼저 요한은 자신을 `너희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매우 겸손하면서 친근한 표현입니다. 그는 나이가 많은 늙은 할아버지였습니다. 나이만 생각해도 형제라고 하기에는 매우 어색합니다. 게다가 요한은 예수님의 수제자 그룹에 속해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많은 영적 비밀과 능력과 은사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권위를 가지고 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받는 소아시아 성도들과 똑 같은 형제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로서 같은 처지에 놓인 형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요한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습니다. 요한은 구원받은 후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은혜만 누리며 구경을 하거나 팔장만 낀 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참하는 자였습니다. 동참하는 자란 companion으로서 친구처럼 함께 교제하며 함께 소유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깊은 친밀성 가운데 모든데서 함께 동참했습니다.
특히 무엇에 동참했습니까? 예수의 환난입니다. 예수의 환난이란 예수 안에서(원어 in의미) 당하는 환난으로서 예수로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고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생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먼저는 자기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는 자기 죄나 욕심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는 자기 환난입니다. 저로 말하면 김제임스의 환난이지 예수의 환난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 중 많은 부분은 이러한 자기 죄나 욕심으로 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이나 욕심 가운데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정말 예수님 때문에 겪는 환난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아니면 당하지 않을 환난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로 예수님과 사명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이나 어려움들입니다. 예를들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출근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사명을 떠나지 않기 위해 연봉의 삭감을 감수하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족들의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이번 추석에 모처럼 내려갔는데,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서둘러 돌아올 때 한 소리를 듣습니다. 이 정도는 새발의 피입니다. 아예 가족을 찾아보지 못할 경우도 많습니다. 직장에서 술을 잘 하지 못함으로 당하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는 고난이 없음으로, 자원함으로 고난을 스스로 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의 고난, 복음전파의 고난, 일대일의 고난, 제자양성의 고난, 세계선교의 고난을 자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또 요한은 예수의 나라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 그 나라를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 건설에 함께 참여했을 말합니다. 이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 바로 환난과 참음입니다. 환난이나 참음없이 예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참음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인내로서 예수의 환난을 끝까지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예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며, 예수님의 나라 확장에 일조하게 됩니다. 실로 인내없이 얻어지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내는 환난을 왕적 위엄으로 바꾸는 영적인 연금술입니다.
요한이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수단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런 환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존경받는 노신사로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하여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불덩어리를 토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며,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밧모라 하는 섬에 가게 된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대신 밧모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밧모 섬은 에베소와 고린도의 중간에 위치한 군도 중 하나의 작은 섬입니다. 길이가 16㎞, 너비가 9㎞되는 작은 섬입니다. 당시 채석장이 있는 황무지였습니다. 주로 정치범들의 유배지였습니다. 요한도 이 섬에서 편안한 쉼은 커녕, 돌을 채집하는 강제노역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강제노역에 시달렸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몹시 외롭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사도 요한입니다. 마지막까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충성했습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끝까지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돌산인 밧모 섬입니다. 고통스런 유배지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문제에 빠져도 한참 빠졌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돌산에서 예수님을 원망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기 쉽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삶은 그렇게 비참함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고난에 동참하는 요한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졌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여기서 `주의 날`이란 오늘날 주일을 가리킵니다. 이때 벌써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지켜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몸은 노구로 몹시 불편했습니다. 잠자리도 마땅치 않았고, 음식도 좋지 못했습니다. 마땅한 예배처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밧모 섬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이 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에 감동된 것처럼 보여집니다. 쉬운성경에는 주님의 날에 `기도`하던 중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영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의 몸은 점점 굳어지고 힘이 빠져갔지만, 영은 성령으로 감동되어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이 때 요한은 불후의 명작인 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할 때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나 성령의 충만함이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난이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도 없을 것입니다. 실로 고난없이 영광없고, 땀 흘림없이 달콤함 없으며,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는 것입니다. 일대일이나 복음전파가 없을 때 성령의 감동하심이 사라집니다. 성령님도 복음 전파의 현장, 특별히 고난당하는 현장에서 더욱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은 요사이 어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삶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계시록을 공부하는 이 가을학기에 새롭게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율전UBF 교회에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었을 때, 그는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10b). 악기 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중의 하나가 나팔입니다. 예전에 군대에 가면 기상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곤하게 자는 병사라 할지라도 모두 깨어 후다닥 일어났습니다. 아마 나팔을 가지고, 이 센타에서 불으면 고막이 찢어질 것입니다. 작은 악기로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누가 배우면 좋겠습니다.
이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은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무기력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큰 나팔 소리처럼 매우 우렁찼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큰 음성으로 말했을까요? 그것은 먼저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음성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내용이야 어떻든 일단 힘이 납니다. 그래서 메신저는 일단 스피릿 넘치는 큰 음성을 내야 합니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영성과 스피릿을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또 주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계시의 말씀을 잘 듣고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소아시아 성도들은 너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의 핍박 때문에 숨도 크게 쉬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큰 소리는 그렇게 기죽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상황이 힘들어도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야 합니다. 스피릿을 내고 힘을 내야 합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뒤에서 큰 소리를 냈습니다. 사람은 누가 뒤에서 부르면 정신을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으로, 이제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주님은 소아시아 성도들 이전에 사도 요한 한 사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 한 사람을 도우심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 전체가 깨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나팔 소리같은 계시록의 큰 음성을 듣고 모두 깨어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Ⅱ.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12-20)
요한이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려고 몸을 돌릴 때였습니다. 그의 눈에 먼저 들어온 광경은 일곱 금 촛대였습니다. 이 일곱 금 촛대는 20절을 볼 때,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금 촛대로 비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금은 귀합니다. 금은 변색이 되거나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처럼 교회는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의 관심은 온통 교회에 있습니다. 또한 금으로 된 촛대였습니다. 그 촛대 위에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면 얼마나 휘황찬란하겠습니까? 이는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이 말씀의 빛, 성령의 빛, 은혜의 빛을 환하게 비추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어찌하든지 밝은 빛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타올라서 어두움을 밝힘으로 죄를 보게 하고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말씀과 성령의 빛이 비추일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말씀의 빛을 밝히 비추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어둡고, 성도들도 어둡고, 교회도 어두운 것은 교회가 말씀의 빛으로 타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요한이 본 것은 그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거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촛대 사이로 인자같은 이가 거니신다는 것은 교회에 임재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직접 임재하셔서 간섭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또 머리로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원래 `인자같은 이`란 단7:13절에 의하면, 메시야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를 사도 요한이 쓰는 이유는 외적으로는 로마당국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1세기 성도들은 `인자같은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곧바로 예수님을 떠올릴 정도로 매우 익숙한 단어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서의 약속의 말씀대로 인자의 모습을 하고 오셔서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가난한 삶을 사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나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속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인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사도 요한에게도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자 같은 이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서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영광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 사이를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요한이 인자 같은 이로서 예수님을 묘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서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과 부활하셔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 바로 동일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1세기 성도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야 했습니다. 그러면 인자같은 이로서 환상 중에 보이신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 어떠합니까?
먼저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구약시대 제사장이나 왕과 같은 고위층에 속한 사람들의 옷차림입니다. 또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있다는 것은 왕의 예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왕적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또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는 흰 양털같고 눈 같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순결, 그리고 영원한 신성을 말합니다. 그의 눈은 불꽃같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시고 아시며, 나아가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 불꽃같은 예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았습니다. 주석이란 불순물이 제거된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처럼 아주 강하며 빛나는 특수 금속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힘과 안전감있는 발로 교회들을 정화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강한 발로 교회 내의 악한 사단의 세력들을 향해서는 여지없이 짓밟아 심판하여 버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재림시의 심판의 발로 보기도 합니다.
또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다는 것은 음성이 매우 우렁차고 힘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판 소리나 창을 익히는 자들이 목소리를 단련할 때 주로 찾는 곳이 폭포수라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폭포가 나이아가라와 남미의 이과수 폭포입니다. 이런 곳에 가면 옆 사람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우렁찹니다. 주님은 이러한 우렁차고 힘있는 음성으로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또 그의 오른 손에 일곱 교회의 사자인 일곱 별이 잡혀 있었습니다. 오른 손은 절대적인 소유와 보호와 권위와 통제를 상징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사자들을 세우시며, 소유, 보호, 통제하고,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란 매우 예리한 양날의 칼이란 뜻입니다. 이는 주님의 예리한 말씀의 능력을 말합니다. 주님의 심판도구나 수술도구는 무엇보다 예리한 말씀이었습니다. 누구도 이 예리한 말씀의 칼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존재목적이나 사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리한 말씀의 칼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무디어지고, 병든 영혼들을 예리한 말씀의 칼로 수술해서 고쳐야 합니다. 말씀의 종인 우리들이 시급히 회복해야 할 능력도 바로 좌우에 날선 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좌우에 시퍼런 날이 설 정도로 말씀의 칼을 갈고 또 갈아야 합니다.
또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습니다. 이는 환상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의 묘사입니다. 해 중에서도 아침 해는 매우 힘있게 비췹니다. 새벽기도 후에 자과 캠퍼스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노라면 너무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너무나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인자 예수님은 매우 사랑스럽고, 은혜가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나타난 인자 예수님은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거지 대장의 모습이 아니라 매우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또 쉽게 친근히 다가갈 수 있기 보다는 웬지 가까이 할 수 없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엄숙한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전지 전능하시며 절대적인 의와 주권과 위엄을 지닌 왕 중의 왕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눈부신 권능과 불가항력적인 세력을 가지신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왜 이런 모습으로 사도 요한과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나타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당시 성도들의 영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미티안 황제의 황제 숭배 강요 사상과 현실의 고통스런 삶으로 거의 절망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본래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은 많은 위로와 소망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모습에 의지하여 좀 더 담대하고 힘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더욱 강한 자부심과 힘있는 제자의 삶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너무나 기가 죽어 있습니다. 1세기 성도들처럼 많은 핍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없이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시시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현실에 끌려 다니는 비참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시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너무나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없이 낮아지시고 겸손하신 분만이 아닙니다.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매우 영광스럽고 강하신 분이십니다. 악의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짓밟아 버리시는 매우 강력한 권세자이십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 힘있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문제로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한없는 연민과 불쌍한 모습을 하고, 겨우 동정을 받아 거지처럼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모두 힘차게 일어나 원수의 세력들을 짓밟고 승리하는 삶,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갈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가을학기 영광과 권능의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 강력하신 주님의 발 앞에 사도 요한은 엎드려져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17). 사도 요한과 우리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우리는 도무지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 죽은 자처럼 엎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 앞에 죽어지내지 않습니다. 대신 얼마나 말이 많은지 모릅니다. 죽기는 커녕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면서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훼손시키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합니다.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이런 우리들이 요한처럼 좀 죽어야겠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발 앞에 아주 완전히 죽어서 계속 엎드려져야겠습니다.
이런 요한에게 주님은 위로자의 모습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 예수님은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여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절대적인 권세자가 되셨습니다(18). 이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을 심판하여 지옥에 던져 넣으실 영원한 생명의 권세,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영광의 주님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다 돌려드립니다. 이 영광의 주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도 좀 더 당당하고 힘있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아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추석 연휴의 늘어진 마음, 게을러진 마음, 계속 놀고 싶은 마음을 모두 버리고 전투하는 교회 제자들로 새롭게 태어나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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