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계시록4강

믿음의 종 2009. 10. 20. 22:43

2009년 가을 요한계시록 제4강(10.18)

 

굳게 잡으라

 

말씀/요한계시록 2:12-29

요절/요한계시록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요사이 차가 많아지는 것만큼 도로가 잘 뚫려서 빨리 달릴 수가 있습니다. 수도권에는 원체 사람이 많고 차들이 많아서 정체가 심합니다. 하지만 수도권을 벗어나 조금만 지방에 내려면 시원스레 달릴 수가 있습니다. 지방의 여러 고속도로는 수백억원을 들여서 새롭게 뚫었는데, 다니는 차가 너무 없어서 한산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수십억원의 적자가 생겨서 재정을 보조하느라 지자체마다 비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운전자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막히는 곳 없이 달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속도로에 누가 큰 돌을 굴려서 걸림돌을 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달리는 차는 십중팔구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서행을 하면서 더 이상 빨리 달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버가모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버가모는 사단의 위가 있을 정도로 우상숭배가 매우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심한 우상숭배 지역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순교자 안디바를 배출할 정도로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외적 핍박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에 들어선 차만큼 매우 잘 달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잘못된 교훈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자들이 생기면서부터 였습니다. 이 잘못된 교훈을 본문은 걸림돌을 놓은 것으로 표현했습니다(14b). 이때부터 교회는 더 이상 힘차게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벅벅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분오열되었고, 교회는 불협화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주님은 이를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주장사 루디아에 의해 개척된 교회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성 주도적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을 정도로 점점 더 좋아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고 따스한 여성 주도적인 교회이다 보니, 사악한 여 선지자 이세벨이 들어와 교회를 휘젓고 다녀도, 어느 누구하나 말리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의 꾀임에 넘어가 음행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세벨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주님은 이세벨의 문제를 치리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도 이런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여 이기는 자로서 주님의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2-17)

 

버가모 교회에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였습니다(1:16). 좌우에 날선 검이란 양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검은 단검이 아니라 원어적으로 보면 장검을 말합니다. 장검은 어떤 때 쓰지요? 주로 전투할 때입니다. 장검을 가지고 부엌에서 무를 자르거나 파를 다듬지 않습니다. 예전에 전쟁을 치르는 군사들, 특히 장군은 좌우에 날이 선 멋있는 장검을 사용했습니다. 이 날선 장검 앞에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습니다.

주님께서 좌우에 날이 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신 것은 바로 주님이 강력한 말씀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검은 모두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그 강력한 말씀의 권능으로 선악과 정사를 가리시고 심판하실 자를 심판하십니다. 또한 수술이 필요한 자는 말씀으로 수술해서 살려놓으십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버가모 교회에 나타난 것은 이 교회에 들어온 발람과 니골라 당의 잘못된 교훈때문입니다. 주님은 잘못된 교훈으로 병든 버가모 교회를 날카로운 말씀의 권능으로 심판하시며 수술하고자 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55마일에 위치한 도시로서 헬라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이 도시에는 당시 장서가 20만권 정도나 되는 매우 큰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수많은 책을 펴내는 도서출판으로 유명했습니다. 또 히포크라스 다음 가는 명의 갈렌을 배출한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이런 헬라문화를 꽃피운 곳이라면 계속 그런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화도시가 사탄의 권좌의 중심지로 서서히 변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버가모는 사탄이 손을 쓰기 전에 이미 도시 전체가 정신적 창기로 전락한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전통적으로 에스쿨라피우스라는 큰 신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신전은 뱀을 주신으로 섬겼습니다. 또 가로가 약 37미터, 세로 약 34미터의 매우 큰 제우스 신전이 성채 위에 놓여져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로마의 황제 신전을 최초로 건설하여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개로는 모자라서 두 개씩이나 건설했습니다. 또 다른 도시에는 일년에 한 번 황제를 숭배했는데, 버가모에는 일년 내내 황제 숭배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황제 숭배에서는 버가모가 소아시아의 리더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를 가리켜 사단의 권좌(본거지, 중심지)가 있는데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극심한 우상숭배가 자행되는 곳에 버가모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교회가 들어섰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통과한 지역이었습니다. 또 3차 때 에베소 개척과 함께 버가모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개척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매우 열악한 외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안디바가 있었습니다. 안디바는 주님의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황제 숭배를 강요한 로마 당국자들과 버가모 종교 경찰의 회유를 뿌리치고 끝까지 믿음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안디바는 죽음으로 끝까지 주님의 충성된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한국의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피 흘리는 순교역사에도 불구하고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3b). 교회 성도 중 한 사람이 끌려가서 고문 끝에 순교했다면, 나머지 성도들은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지거나 배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순수복음 신앙, 순교신앙으로 결사항전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파이팅 스피릿을 가지고 사단의 세력과 싸우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교회가 왜 책망을 받게 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두어 가지`란 숫자적으로 한 두 가지란 말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a few things, 약간의 일들이란 뜻으로서 숫자보다 내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2% 부족한 약간의 일들이 교회의 영적 생명에는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2%가 교회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영적 생명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발람의 교훈이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 은밀하게 들어왔고, 이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생겨났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를 낸 교회였고, 순교자의 반열에 동참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밖으로부터의 핍박은 이겼으나 안으로부터의 은밀한 유혹에는 넘어갔습니다.

먼저 주님은 교회 공동체의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쉬운 성경은 이 부분을 “너희 가운데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을 왜 그대로 보고만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치리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잘못된 교훈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면 예리한 말씀의 능력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심각히 받아들이고 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음행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치리하지 않는 교회를 꾸짖었습니다. 고전 5: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는 음행문제가 매우 심각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풍조가 교회 안에 밀려 들어와서 심지어 아비의 후처를 자식이 취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도 방치한 고린도 교회를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교회는 본질을 흔들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통한히 여겨야 합니다. 쫓아내야 합니다.

 

버가모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발람의 교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발람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14b절에서는 이를 가리켜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발람은 이방인 출신으로 하나님의 존귀한 선지자였습니다. 가짜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진짜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선지자가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데 발람은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잘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모압 왕 발락의 초청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왜 받아들였을까요? 뇌물을 받고, 더 많은 물질과 보물을 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발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나귀를 통해서라도 저주하러 가는 발람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또한 그 입에서 저주대신 축복의 말이 쏟아지게 하셨습니다. 이런 발람을 보고 모압 왕 발락은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최후의 비장한 카드를 꺼내서 발락에게 한가지 술수를 제공했습니다(민24:14, 31:16). 그것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수양회만 했기 때문에, 정욕으로 유혹하면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락은 싯딤 골짜기에서 함정을 팠습니다. 예쁜 모압 여자를 끌어 모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광란의 나체 춤을 추고 음행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압의 신들에게 절하고, 여자들과 뒹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 2만 4000명이 염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은 일차적으로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물질에 대한 탐심과 욕심을 놓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욕과 우상숭배에도 쉽게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물질을 우상처럼 더 사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신을 동시에 사랑합니다. 정욕신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사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다리 걸치기 신앙을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중심에 모시고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롯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발람도 모세의 칼에 죽었습니다(민31:8).

우리가 발람의 교훈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외적인 핍박보다 내적으로 은밀히 파고드는 유혹이 더욱 무섭다는 것입니다. 만연된 황제숭배에도 견디던 버가모 성도들이 내적인 물질과 정욕의 유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만히 들어온 발람의 교훈은 없습니까? 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그러나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섬기는 것 같습니다.

본부 홈피에 올라온 멕시코 황아브라함 선교사님의 남미 개척사를 읽으면서, 새롭게 예전의 스피릿을 회복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남미 개척 선교사들은 무엇보다 우선하여 하나님을 섬길뿐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모든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양들에게도 이를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불같은 개척역사가 경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스피릿을 앗아가는 세력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만히 들어온 이 시대의 발람의 교훈을 쫓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복음에 기초한 새로운 패기와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15절에서는 이를 “이처럼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고 말했습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 근본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우리는 `회개하라`는 말씀을 수없이 듣습니다. 특히 계시록 말씀을 공부하면서 더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는 적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돌아서면 땡인 형식적인 신앙을 버려야겠습니다. 무서운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제는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게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b)” 내가 회개치 아니하면 주님께서 오셔서 회개케 하십니다. 주님은 그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말씀의 검으로 회개치 않는 자들과 싸우십니다. 때로는 찌르기도 하시고, 때로는 베어 버리기도 하십니다. 이 주님의 날카로운 말씀의 검 앞에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교훈에 넘어가지 않고 이기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주어집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에게는 두가지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비밀스런 만나로서 주님 자신의 생명을 말합니다. 흰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는데,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자가 없습니다.

무슨 새 이름일까요? 주님의 이름이거나 받는 자의 새 이름일 것입니다. 이 당시 흰 돌은 공식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티켓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한 자에게는 더욱 더 많은 축복이 주어집니다.

 

Ⅱ. 굳게 잡으라(18-29)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18, 1:14,15). `그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모든 것을 통찰하시고 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 발이 빛난 주석같다`(청동)는 것은 교회를 정화시키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두아디라 교회가 용납한 이세벨이라는 거짓 여 선지자 때문입니다.

두아디라는 버가모 동남쪽 64㎞에 위치한 일곱 도시 중 가장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공업도시로서 상업이 번창했습니다. 여기에 따라 많은 조합(길드)이 발달되었고, 행상들도 많았습니다. 이 도시는 아폴로를 주신으로 섬겼고, 또 조합마다 섬기는 수호신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드마다 새 해가 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수호신에게 고사를 지냈습니다. 이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이 들어 왔습니다. 성도들이 여기에 따르지 않을 때는 왕따를 당했고, 많은 경제적 불이익이 가해졌습니다.

 

이런 두아디라에서 어떻게 교회가 개척되었습니까? 이는 두아디라 출신의 자주장사였던 루디아가 빌립보에서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영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빌립보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고향에 돌아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두아디라 교회를 개척한 여장부였습니다. 우리 센터의 루디아 목자도 양들의 눈치만 보거나 운명적인 생각에 종노릇하지 말고, 이런 당당한 믿음의 여장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성격은 조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두아디라는 여성이 조상이기에 눈물이 많았고, 따스한 사랑과 섬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애정을 가지고, 이 교회에 일곱 교회 중 가장 긴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서 사업은 직장 내 사업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행위를 말합니다(2:2의 행위와 동일한 단어). 에베소 교회는 주님을 섬기는 많은 행위가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는 주님을 섬기는 행위뿐만 아니라 따스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믿음도 좋았습니다. 그들에게 순수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섬김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툴툴거리면서 섬기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그 모든 어려움에서 인내를 실천한 아주 귀한 교회였습니다.

나아가 두아디라 교회가 더욱 귀한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그것은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더욱 많았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갈수록 모든 면에서 좋아지는 교회였습니다. 대개 시간이 흐르면 에베소 교회처럼 사랑을 잃어버리고 굳어지거나 형식적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자연법칙을 거슬려 올라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낡고 후패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향한 행위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갈수록 타올랐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연법칙이 아닌 성령의 법칙,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몸부림치는 영적 투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에도 주님께서 책망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자칭 선지자란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원래 이세벨은 시돈 왕의 공주였습니다. 시돈 왕은 `엣바알`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그 뜻은 `바알과 함께`로 골수 바알 숭배자를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이런 여자가 핫바지같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로 시집을 왔습니다. 왜 왔겠습니까? 바알을 퍼트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조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아주 커다란 비극이었습니다. 이 여자로 말미암아 온 나라 백성들이 바알 숭배자로 전락했습니다. 게다가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보는 족족 잡아 죽여서 씨를 말렸습니다. 이런 여자를 가리켜 독부라고 하지요.

두아디라 교회에 들어온 이세벨은 어떤 자일까요? 어떤 학자는 실제 인물이라기 보다는 잘못된 교훈이나 음란한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실제 인물이라고 봅니다. 곧 이방종교에서 개종의 탈을 쓰고 침투해 들어온 악녀라는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에도 신천지라는 이단이 그 뿌리를 감춘 채 교묘히 들어와서 교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그런 부류의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세벨은 종교적인 신비한 능력을 갖춘데다 미모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녀는 강남의 유명하다는 성형외과를 찾아가서 대부분의 얼굴을 뜯어 고쳤습니다. 왜 뜯어고쳤을까요? 남자들을 호리기 위해서입니다.

20b절에서는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고 말했습니다. 이세벨은 뛰어난 외모와 신비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종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결과 행음이 이루어지고, 우상의 제물도 쉽게 먹게 되었습니다. 행음이란 종교적인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간음을 말합니다. 이 여자는 꼬시는 여자, 유혹하는 여자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 한 여자를 막지 못해, 온 교회가 파탄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주님의 종들이 이 한 여자의 꾀임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두아디라 지방에 널리 퍼진 우상숭배가 한몫을 했습니다. 회사만 가면 노조에 가입하라고 하고, 노조는 조합원 단합이라는 미명하에 자주 고사를 지냈습니다. 그 고사의 핵심은 이세벨 같은 여자들을 불러서 함께 춤을 추고, 밀실에 가서 술을 먹고 행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많은 불이익을 주어서 결국에는 회사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니 우상을 숭배하고 행음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요사이 우리 센터에도 이세벨이 되고자 은밀히 성형수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매님들이 예뻐지고자 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원초적인 욕망입니다. 자매님이라면 다 예뻐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그 길이 있다면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빚까지 지면서까지 수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이 시대의 이세벨이 되고자 하는 저급한 욕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의 깊은 곳에는 정욕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수준낮은 현실이 서글픈 것입니다. 이는 가치관이 변하지 않아서입니다. 바울은 딤전2:9절에서 “이처럼 여자들도 단정하기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와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자매들은 외모를 꾸미기 보다 내면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외모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최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걸작품을 뜯어고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도 이세벨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자는 아합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같은 과나 이웃부서에 있는 김세벨이나 박세벨같은 여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 빠지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회개의 기회를 주었으되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사람이 잘못할 수 있습니다. 수술로서 이세벨이 되고픈 마음을 품을 수 있고, 실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그런데 회개를 거부하기에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어디에 굴러 떨어지게 됩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그들 침상에 던질 것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회개를 거부하면 쾌락의 침상이 병상의 침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병상의 침상에서 일어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또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은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지게 됩니다. 또 주님께서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의 자녀는 실제 육신의 자녀일 수 있고, 잘못된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를 통해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은밀히 이세벨과 간음하는 자들까지도 모두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과의 간음은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행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 앞에서 숨은 연애감정, 음란한 정욕의 죄성까지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어찌하든지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회개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더욱 엄위하신 주님의 심판이 기다립니다. 점점 생활이나 자녀문제, 장래문제에서 수렁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 중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들에게 다른 짐으로 지울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곧 현재하고 있는 것을 계속 꾸준히 잘 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들이 계속 잘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두아디라의 남은 자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순수 복음신앙에 기초한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입니다. 이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굳게 잡아야 합니다. 굳게 잡는다는 것은 계속성과 지속성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종말신앙은 무슨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거나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타협하지 않고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박하게 배운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순수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굳게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굳게 붙잡지 않으면 이세벨의 교훈에 휩쓸려 갑니다. 그러면 어느 사이 강남의 성형외과에 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6). 이런 자는 철장 곧 쇠막대기를 가지고 악한 자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깨부술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영광과 심판하시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기는 자에게는 빛나는 새벽 별을 주십니다. 빛나는 새벽별은 주님 자신을 말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의 모든 것을 차지하며 그 영광과 축복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는 발람과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기 쉬운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죄의 위험성에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물질과 쾌락의 유혹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거친 죄의 탁류가 되어 우리 앞에 거칠게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적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배운 교훈, 우리에게 남아있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순수 복음신앙을 가지고,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달려가는 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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