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요한계시록 5강

믿음의 종 2009. 10. 29. 12:48

2009년 가을 요한계시록 제 5 강(10.25)

 

깨어나라!

 

말씀/요한계시록 3:1-13

요절/요한계시록 3:2a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속은 그만큼 알 수 없으니, 사람은 겪어보아야 안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런 유의 속담으로 “겉다르고 속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겉모습과 외형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겉모습을 꾸미기에 너나없이 분주합니다. 또한 이러한 데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들여가면서 치장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어떤 여인이 너무나 멋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백마탄 남자, 환상의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해서 사귀어 보니 거의 시궁창 수준의 썩어가는 남자였습니다. 그것도 이 여인이 깨어 있고 분별력이 있어서 알아냈지, 이마저도 없었다면 똑같이 썩어갔을 것입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제비족처럼 그럴듯해도, 가까이 해보면 너무나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겉으로 보는 것과 속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번지르르한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하얀 대리석 건물로 지어서 화려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안에 들어서면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또 다른 삐까번쩍한 대리석으로 얼굴이 다 비쳤습니다.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도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고관들이 많았습니다. 교회는 카페처럼 아늑했고, 사랑방처럼 구수하고 좋았습니다. 모두 부유하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평판도 좋아 좋은 교회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데 교회에 충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사데교회는 이미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死데교회입니다. 사(死)데 교회로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서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식물인간과 같은 교회였습니다. 사데교회는 이제 호흡기만 떼면 완전히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미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아주 초라한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겨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했을 뿐이었습니다. 숫자도 적었고, 나오는 사람들도 사회적인 신분이 변변치 않는 노예나 천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빌라델비아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많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사데교회의 모습을 벗고, 주님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1-6)

 

사데는 두아디라 남동쪽 48㎞지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지도를 보면,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가 내륙 북쪽에서 남쪽으로 밑으로 내려가면서 일렬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데는 양모 사업이 발달한 매우 부유한 섬유도시였습니다. 양모를 가공, 염색, 직조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또 이 도시는 사금인 금 모래로 유명했습니다. 게다가 성채는 높은 암벽 위 고원지대에 세워져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이런 지리적, 경제적 여건들은 자연히 도시 전체를 사치와 안락함에 빠지게 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해 염려함이 없고, 돈이 많으니 자연히 사치와 방탕과 안일함게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도시가 섬기는 신은 Cybele라는 여신이었는데, 탐심과 과소비와 도덕적 문란을 조장하는 악명 높은 여신이었습니다.

 

이런 곳의 사데교회에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교회에 주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키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1:4,20). 왜 주님은 사데교회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잉태하고 거듭나게 하며 자라게 하십니다. 교회가 생기고 자라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회가 죽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관습이나 제도가 될 수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가 들어올 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그치고 죽어가게 됩니다.

 

또 주님은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일곱 교회 지도자들을 붙잡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도자는 바른 말씀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책임지고 보호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사데교회가 죽은데에는 교회 지도자가 한몫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바른 말씀선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세가지 징표로 바른 말씀의 선포, 세례와 성찬 등 성례전의 시행,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권징을 들었습니다.

이 중에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말씀의 선포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바른 말씀의 선포, 율법이 아닌 복음의 선포가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가 이런 말씀 사역에 주력하지 않고, 정치를 한다든지, 사업을 한다든지, 사무적인 일에만 힘쓴다면 얼마가지 않아 교회는 죽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죽은 교회를 다시 살리시고자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죽은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참된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또한 참된 주님의 종들의 강력한 말씀의 증거, 복음의 증거가 필수적입니다. 그것도 교회가 중병에 걸려서 이미 죽은지 오래이거나 죽어가고 있을 때는 한 두 번으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강력한 성령과 말씀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일어날 때 교회는 영적 침체기를 벗어나 비로소 부흥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데교회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1b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기서 행위는 다른 교회처럼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행위들이 아닙니다. 이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하는 행위들(짓거리)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쉬운성경은 이 부분을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사람들은 네가 살아있다고 하나 사실은 죽은 자와 다름없다”고 번역했습니다.

사데교회는 이름은 번지르르 했습니다. 겉모습은 매우 요란했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데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살아있는 교회, 스피릿이 넘치는 교회, 모범적인 교회로서의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데교회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이름만 그렇지 사실은 죽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이름과 달리 내적으로는 거의 다 죽어가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외형과 형식만 남고, 생명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데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출석해서 앉아있기는 했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전부 시체들이 와서 앉아있는 바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 명성이 자자했던 사데교회가 왜 이렇게 죽었을까요? 어떤 원인으로 성령님의 역사가 그치고, 바른 말씀 선포가 사라진 것입니까? 아마도 사데도시의 부유함과 안일함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도시의 부유함과 안락함 속에 교회도 목자도 함께 잠을 자게 된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다른 교회처럼 극심한 황제숭배의 핍박이 없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이니까 왜 없겠냐마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교회 내적으로 다른 이단이나 거짓된 교훈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교회를 어지럽힌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도 없었고, 일대 섹스 스캔들을 일으킨 이세벨의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죽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매우 무기력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원인이 없이 죽었다면, 그냥 저절로 죽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외부적인 핍박이나 내적인 유혹이 없습니다. 게다가 힘써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부유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가운데 평안합니다. 이 때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죽어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구리 우화를 아십니까? 개구리가 뜨거운 물에 넣으면 금방 튀어 나옵니다. 그런데 찬물에 넣어서 불을 때면 아주 기분좋게 늘어져 잡니다. 결코 튀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아주 익어서 죽게 됩니다. 그것을 개구리 보신탕이라고 하죠.

 

사실 사데교회 부분은 준비 공부할 때부터 저의 마음이 특히 아팠습니다. 말씀이 콕콕 저의 가슴을 후비고 찔러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나 흡사하게 율전 UBF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율전은 조상들의 목소리가 커서인지 좋은 쪽으로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이름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율전하면 스피릿 좋고, 믿음의 야성이 넘치고, 목소리 크고, 시골 머슴같은 터프한 형제목자들이 많고, 제자양성을 모범적으로 하는 센타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이 보아도 거의 다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사단의 시험도 한 두명이 아니라 너무나 많이 받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것도 목자로서 치명적인 시험들입니다. 새내기를 중심으로 하는 제자양성 모임을 하면, 그래도 생명력이 있는데 동역자 모임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금요 기도회가 그래요. 왜 이렇게 죽어가고 있을까요? 모두 안락함과 편안함 속에 안주하거나 잔재미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주와 복음을 위해 애써 고생하려들지 않아요.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고 인식의 대전환이 와야 해요. 그리고 주님께 살려주시도록 부르짖어 기도해야 해요. 우리는 계속 위기입니다. 그래도 위기로서의 인식이 없어요. 이것이 아픈 것입니다. 그저 개인의 안일과 쉼과 잔재미와 개인생활에만 몰두해 있어요. 우리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어 비장한 각오로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의 스피릿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이런 율전UBF를 보고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요? 이런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요?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는 `일깨어, 일깨지 아니하면`처럼 일깨어란 단어가 두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영어로는 `Wake up!`으로 `깨어나라!`는 뜻입니다. 죽은 것이나 잠자는 것은 겉모습이 매우 비슷합니다.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 잠자는 것이고, 잠자는 것이 죽은 것입니다. 사데교회를 가리켜 `죽었다`하는 것이나 `잠자고 있다` 하는 것이나 모두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런 죽은 교회나 개인이 살아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주님은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이란 `거의 죽으려하는(is about to die)`의미로 `아직 죽지는 않았으나 곧 죽게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쉬운 성경은 “완전히 죽기 전에, 아직 조금이라도 남은 힘이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죽음의 잠 속에서도 다 없어지지 않은 약간의 남은 은총들, 남은 불씨들을 말합니다. 이 씨는 희망의 불씨입니다. 생명의 불씨입니다. 사랑의 불씨입니다. 이 불씨가 다 꺼지기 전에 애써 살리라는 것입니다. 불씨를 더욱 지피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아주 단순한 표어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유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씨를 살리려면 서로 모여야 합니다. 흩어지면 작은 불씨로서 곧 꺼지겠지만, 모이면 작은 불씨가 큰 불 길로서 타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웬만한 캠퍼스를 다 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름을 딴 학생복음운동이 미국의 SVM 건초더미운동입니다. 건초더미가 작은 불씨에 의해 타올라 온 캠퍼스를 태우리라는 비전을 가진 학생복음운동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다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불이 붙지 않아서 그렇지, 저마다 불씨를 가지고 살아나고자 하는 몸부림들이 있습니다. 금요기도회 소감을 들어보면, 이런 아름다운 몸부림들이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기뻐받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를 붙잡아야겠습니다. `나 한 사람쯤이야` 하지 말고,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이루듯이 모이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나아가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3a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주님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울 때 생각해야 합니다. 죽어감을 느낄 때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는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그리고 더욱 지켜 행하고자, 순종하고자 애써야 합니다. 사데교회가 죽은 이유는 편안함 속에 아무런 생각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지켜 회개해야 합니까? 처음에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은 것`입니다. 이는 처음 들은 복음을 말합니다. 사데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무슨 신령한 능력을 체험하고, 많은 말씀을 새롭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듣고 받은 복음을 다시 기억하고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갈5:7, 골2:6). 다시 복음을 철저히 붙들고, 복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처음 받은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살아나는 지름길입니다. 교회가 죽는 것은 복음이 반복적으로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선포되지 않으니 성령께서도 역사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개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양강좌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죄를 깨닫고 구원의 능력을 베푸는 복음 앞으로 다시 나아오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앞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소감을 깊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이나 교회는 모두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으로 일깨지 않을 때 주님께서 도적같이 이르러서 심판하십니다(3b). 그러므로 깨어나지 않는다고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마치 추운 겨울에 술에 취해 잠들은 사람을 그냥 두면 죽어 버리듯이, 전부 죽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강제적으로도 깨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데교회가 전부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 교회에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복음을 붙잡고 깨끗한 행실 가운데 구별되어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그 시대 살아있는 자들이요, 깨어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흰 옷을 주어 입게 하십니다(4b). 이 흰 옷은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케 된 옷으로서 승리의 옷을 상징합니다. 나아가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흰 옷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5). 이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결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율전센타에도 죄악에 물들지 않고 영적 순결을 지키는 순수한 자들이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이 더럽고 타락한 세속문화에 물들지 않은 삶입니다. 페트라 목자가 자신은 연애한번 못해 보았다고 푸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푸념할 일이 아닙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 중의 한 명으로서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사데교회가 잠들고 죽게 된 것은 안일함 가운데 세상의 온갖 죄악으로 옷을 더럽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타락한 세속문화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온갖 음란한 영상물이 TV와 인터넷과 영화를 도배하고 있습니다. 또 포스트 모더니즘에 기초한 개인주의, 이기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도 영향을 받아서 영혼이 죽거나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아무리 두들겨 패고, 아무리 깨워도 깨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악의 술에 취해, 안일한 삶에 취해, 잔재미에 취해, 개인생활에 취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도 주님은 깨우기를 원하십니다. “깨어나라!”고 명하십니다. “깨어나라!” 우리는 깨어나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모여서 불씨를 살려야 합니다. 다 죽기 전에, 더 죽기 전에 깨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다시금 폭발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Ⅱ.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7-13)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40㎞지점에 있는 고원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포도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 신도 포도주 신인 `디오니소스`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또 다른 특징은 헬라 문화와 언어를 전파하는 헬라문명의 중심지로서 `작은 아테네`라고 불렀습니다. 또 이 도시는 크고 작은 지진이 많았습니다. AD 17년에 대지진이 있었는데, 특히 빌라델비아 지역이 심해 많은 부분이 대파되었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로 나타나셨습니다(7). 거룩, 진실은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로서, 영생의 수여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이 예수님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결정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칭찬없이 책망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없이 칭찬만 하셨습니다. 주님의 칭찬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고 말합니다. 열린 문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열린 천국 문을 말합니다. 또 어떤 분은 복음 전도의 문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복음 전도의 문이 열림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니까 사실은 같은 말입니다. 교회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말입니다. 우리 율전도 복음 전도의 문,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왜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이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작은 능력이란 영적인 능력보다 사회적으로 외적 신분이 천한 자를 말합니다. 그들 중에 가난한 자, 신분이 천한 자, 노예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조건이 변변치 못했습니다. 게다가 빌라델비아 교회는 숫자적으로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규모 공동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외형은 초라한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신하지 않는 면에서는 단연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나아가 어려움 속에서도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분이 낮다고 자의식을 갖고 힘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힘에 밀려 로마황제를 숭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압적인 황제 숭배 분위기 속에서도, 결코 주님의 이름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적은 능력 속에서도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과 말씀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부자교회로서 마음이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부유하고 안락한 마음으로 더욱 세상과 쾌락과 물질을 탐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세상의 것으로 배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님과 말씀 앞에 가난하고 겸손했습니다. 그들은 그 가난함과 겸손함으로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말씀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인간적으로는 작은 능력을 가진 자였으나 영적으로는 매우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교인들의 숫자는 적었으나 매우 믿음이 좋고,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켰으며,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델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를 어떻게 축복하십니까?

 

첫째로, 거짓말 하는 자들 몇을 주어 교인들 발 앞에 엎드려 절하게 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사탄의 회당, 자칭 유대인, 거짓말 하는 자들은 모두 같은 인물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로서 율법과 할례를 통한 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거짓말 하는 자들로서 복음의 원수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교묘한 핍박자들, 매우 악질적인 자들을 빌라델비아 성도들 앞에 무릎꿇어 절하게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서 신실하게 주님을 따른 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핍박자들을 무릎꿇게 하심으로 주님께서 살아계심과 성도들을 사랑하심을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마음에 들면,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원수들이나 복음의 훼방자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십니다(10). 이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인내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참고 인내하셨습니다(히12:3). 인내는 신앙생활의 핵심요소 중 하나입니다. 유혹이 많은 요사이는 더욱 인내가 필요합니다. 실로 인내없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인내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픔과 어려움과 환난을 잘 참아야 합니다. 기도응답이 잘 되지 않아도 참아야 합니다. 약속이 더디 성취되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고지가 저기인데 예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은 주님께서 장차 온 세상에 임할 큰 환난을 면케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큰 환난을 면케 해 주니니 자잘한 환난도 면케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심는데로 보상해 주십니다.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 주님께서 나를 지켜 주십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주님께서 나의 일을 해 주십니다. 내가 가진 복음을 굳게 잡을 때, 주님께서 면류관을 주십니다(11).

 

셋째로,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는 축복입니다(12). 이는 끝까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켜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성전 기둥이 된다는 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이런 자는 결코 다시 나가지 않습니다. 진도 7이나 8의 강진과 같은 환난이 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께서 안전히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된 삶을 말합니다.

나아가 이런 자들에게는 3중의 새 이름을 받게 되는 축복이 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입니다. 이름은 소유와 자격의 의미가 있습니다. 곧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천국시민의 자격과 재림시 주의 자녀로서 인쳐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데교회는 많은 것을 가진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유함과 교만 속에 교회는 명성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하여 “깨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깨어나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음성은 피를 토하듯 간절하고도 애절한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많은 것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에 열린 문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원수들을 무릎꿇게 하셨습니다. 앞으로의 환난을 면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기둥이 되게 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두 교회 중 어느 곳에 속한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데교회에 속했다면 “깨어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복음을 다시 굳게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라면, 가진 것을 굳게 잡고 주님오실 때까지 인내하며 계속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진정 우리들이 죽음과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 끝까지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행위를 아십니다. 이 주님 앞에 흔들림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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