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릴을 즐기시는 하나님 "
요절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1. 겸손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
저는 1960년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기슭에서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성실하신 부모님 밑에서 착한 아들로 성장했으며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키가 크지 않았고 이마가 넓지 않았습니다. 함께 살던 외할머니는 남자는 이마가 넓어야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자주 강조해서, 전두환 대통령처럼 머리 벗겨진 사람을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또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장차 충성스런 비서나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외모에 대한 운명주의와 함께 해결할 수 없는 사춘기의 정욕 문제로 고통했습니다. 1979년 고려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한 이후 도서관에서 전도를 당해 안암 센터에서 1대1 말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해 가을 센터에서 출애굽기 말씀 공부를 했는데 많은 목자님들이 유월절 어린양 소감 발표를 하면서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고백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주로 센터에 머물며 다른 사람들의 소감을 커튼 뒤어서 듣고 있었는데, 저는 목자님들과 누님들의 진솔된 죄 고백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도 저의 지은 죄를 용감하게 고백해야 되겠다고 자극을 받고 다음날 저의 모든 죄를 소감을 써서 발표를 자청하여 낱낱이 고백하니 좀 창피하긴 했지만 죄사함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사귀던 자매님과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께 나의 마음을 다 바쳐야 하겠다’고 말하고 아쉽지만 과감하게 헤어졌습니다. 2학년 때 학과 선택을 해야 될 때는 수업 시간이 많은 기계공학과나 전자공학과 보다 훨씬 여유가 있던 산업 공학과를 택했습니다. 형부터 시작해서 아는 친구들에게 일대일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안암 센터 첫번 제자 그룹인 Seven Tiger의 한 멤버로서 양마가 목자님께로 부터 직접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베드로라는 크리스챤 네임도 받고 모든 분들로 부터 듬뿍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저는 먹는 모임에는 빠지지 않고 다 참가해서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했습니다. 그래도 배가 출출할 때는 일대일 목자님을 찾아가서 ‘사랑하는 양이 지금 배가 고프니 목자의 심정으로 라면 좀 끓여달라’고 강요했습니다. 대학 2학년 2학기 때부터 법대 개척 요회 요회 목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그 당시는 그만큼 학생 제자들에게 큰 소망을 두고 중요한 직책을 맡겼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장차 풀타임 스탭 목자로 살고자 소원을 가졌습니다. 섬기던 양들 중에 훌륭한 양들이 많았습니다. 이 양들 덕분에 저의 주가가 상당히 많이 올라갔고, 저는 특히 “그 목자에 그 양” 이라는 말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양이 없거나 잘 못키우는 사람들은 목자의 심정이 없어서 그렇다며 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심히 교만해져서 전요한 선교사님이나 양마가 선교사님 외에는 별로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는 현재의 구센터 건축 역사에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빼어난 일군으로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1983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졸병으로 입대했습니다. 처음엔 군수과의 행정 요원이었지만 주일 예배를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노력했을 때, 신앙을 인정받아 연대 군종병으로 발탁되어 군대 교회에서 생활하였으며 성경을 4번 반 통독하고 육군 병장으로 전역헀습니다. 군 제대 이후 바로 풀타임 인턴 목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86년 9월에 안암 센터 자매 인턴 목자였던 송유미 목자(크리스틴 조 선교사)와 가정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 분은 그 당시 일대일을 일주일에 수십 팀씩 하며 헌신하던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프리카 흑인 자매와도 믿음의 결혼을 하고자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 횡재냐’ 하며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가정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곧 성이삭, 성리브가, 소안드레 선교사님, 서바나바 목자님, 서영미 사모님 등 몇몇 동역자들과 함께 중앙대 복음 역사를 위해 한강 센터를 개척했습니다. 첫 센터 장소는 저희 신혼 집의 한 방이었습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성령의 역사가 활발해서, 현재 멕시코의 홍다윗, 홍에스더 선교사들을 비롯한 중앙대 조상들이 굳게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여러 동역자들이 군대로 혹은 선교사로 빠져나가면서 역사도 정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원하던 대로 역사가 잘 성장하지 않자 저의 교만은 바닦이 났습니다. 큰 역사를 이루어 저의 이름을 내고자 했던 인간적인 야심이 다 꺾였습니다. 저는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목자 생활을 한 것이 제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저는 연약한 자, 양 잘 못치는자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기쁨이 역사의 잘되고 못됨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 관계성을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마음이 낮아졌을 때 저는 UBF 웹페이지 신앙 상담 코너를 통해 여러 문제 많은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었고, 그 이후 하나님은 한강 센터 역사를 축복하사 황노아 목자님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2000년은 제 나이가 40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저는 모세와 같이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국제적인 성경 선생이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저는 International Bible Teacher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지만 원어민 목자들을 만나면 How are you? 하고 인사만 반갑게 하고 바쁜 척하며 피해다니기 바빴습니다. 또한 저는 우리 모임이 평신도 선교사 모임임을 인식하고 나 자신이 평신도 선교사로 살아봐야 그들의 실상을 잘 인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01년 여름에 당시 한세 센터를 섬기고 있던 강득현 목자님께 책임 목자직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분은 저의 일대일 양인 모스크바 최요나단 선교사님의 양입니다. 그후 저는 안암 센터에 1년간 출석하며 기도 지원을 받고 박정 어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인 유학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TOEFL과 GRE시험을 준비했는데, 나이든 아저씨가 젊은 학생들하고 섞여서 공부할 때 자의식이 들기 쉬웠지만 믿음으로 극복하고 좋은 성적을 얻습니다. 드디어 시카고의 한 대학원의 입학 허가를 받아, 2002년 8월 12일에 온 가족이 미국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 되었습니다.
2. 스릴을 즐기시는 하나님
시카고 센터에서 반 년을 지내며 공부하다가, 2003년 1월 부터는 수학 교사가 되기 위해 뉴욕주립대 University at Buffalo로 학교를 옮겨서 수학과 석사 과정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나이 40이 넘어서 유학을 갔기 때문에 학교에서 장학금 받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버팔로 수학과 석사 과정 동안에 조교로 일할 수 있다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조교가 되려면 첫학기에 All A를 받아야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날마다 밤늦게 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했습니다. 내용이 도저히 이해가 안되면 제 머리에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솔로몬과 요셉과 다니엘에게 주셨던 지혜를 주십시오.” 그때 난생 처음으로All A도 받고 조교 자리도 얻게 되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는 나이아가라 폭포 옆에 있는 일식 부페 식당에서 4개월 동안 웨이터로 일했습니다. 난생 처음 해본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손님 접대를 생각하며 “Welcome”하며 큰 소리로 환영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밤늦게 집으로 갈 때는 다리가 무겁고 온 몸이 피곤했지만 선교지에서만 해 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흐믓했습니다. 대학원 수학 공부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졸업 자격 시험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저는 두렵고 떨림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며 공부했습니다. 드디어 2년 만에 수학과 석사 과정을 다 끝내고 뉴욕시로 이사를 가서 중, 고등학교 수학 교사 자리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치열한 비자 경쟁 때문에 노동허가 비자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루빨리 수학 교사가 되어서 자립을 하고 싶었지만 비자 때분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체류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공부를 해야했습니다. Long Island의 Molloy College에 수학 교육학과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저는 물질 문제 해결을 위해 동시에 한 델리 가게(편의점 + 샌드위치점)에서 주방 보조로 일년 동안 일했습니다. 아침 6시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집에서 30분 동안 승용차를 타고 가서 일을 해야 했지만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없이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닭을 자르고 베이컨을 굽고 야채나 과일을 다듬으며 하루종일 칼질을 하고 나면 어깨가 뻐근했습니다. 새벽부터 델리 가게에서 오후까지 일하고, 저녁에 학교로 가서 수업을 들을 때는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지고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비자 문제만 해결되면 이런 생활은 곧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가운데서 꾸준히 견뎠습니다. 그러나 2007년 여름에 수학 교육학과 석사 과정까지 다 마쳤지만 아직도 노동허가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교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취업을 할 수 없어 계속 학생 신분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왜 저의 체류 문제와 자립 문제를 지체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을 믿고, 다시 전에 다니던 University at Buffalo에 수학 교육학 박사 과정을 지원하여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한 후, 미국 전역에 백 여군데의 대학에 구직 신청서를 넣었습니다. 마침내 죠지아 주에 있는 College of Coastal Georgia에서 인터뷰를 하고 통과가 되어 수학과 전임 강사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대학에서 2008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체류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올해 3월에는 제 아내와 제가 영주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현재까지 2년 반 동안 계속 일해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언어 문제 때문에 강단에 서기가 두려웠습니다. 실상 저는 한국에서 선생님 생활을 한 적도 없고 수학을 가르쳐 본 적도 없었습니다. 오직 목자 생활만 하고 성경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다 모든 것을 영어로 말해야하니 모든 것이 두렵고 떨렸습니다. 혹시 잘못해서 한 학기도 못 버티고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저의 믿음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시에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바락 오바마는 흑인이었습니다. 흑인들은 아직도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나이도 저보다 한 살 어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거 과정에서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30, 40명의 학생들 앞에 설 것을 두려워 하며 쫓겨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믿음없는 것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담대히 도전하고자 방향잡았습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교수가 아니라 아예 명교수로 인정받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어차피 예민하게 신경써봤자 경상도 영어 엑센트가 없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음에 너무 신경쓰지않고 담대하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중요한 단어들은 PowerPoint 작업을 하여서 학생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단어를 힘들게 발음하면 학생들이 ‘아 저 단어를 저렇게 발음하는구나’ 하며 알아서 이해해 주었습니다. 모든 수업 과정을 PowerPoint로 작업을 하고 모든 배경 화면을 멋있는 National Geographic에 나오는 경치 그림으로 디자인했습니다. 그리고 매 슬라이드마다 재미있는 사진들을 넣어서 공부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수업 중간에 YouTube를 이용해서 3-4분 정도되는 신나는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영어 발음 때문에 시비 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의 직속 상관인 학장은 저에게 수업을 참관하고 4점 만점에 3.9점의 아주 우수한 평점을 주었습니다. 매학기마다 하는 학생들의 교수 평가도 한 명도 예외없이 아주 재미있고 잘 가르치는 훌륭한 교수로 평가해 주었습니다. 언어 문제를 믿음으로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립니다. 지난 학기 부터는 아예 수업 첫시간 부터 제가 미국에 선교사로 왔음을 밝히고 누구든지 일대일 성경공부를 원하면 무료로 할 수 있다고 광고했습니다. 그랬더니 Benjamin 형제가 성경 공부를 하고 싶다며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한 번은 너무 적으니 두 번씩 하자고 해서 매주 제 연구실에서 두 번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현재 요한복음 6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형제가 제자로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현재 저는 Buffalo 대학에서의 박사 과정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일을 해보니 대학생들을 하루 종일 접할 수 있어서 이곳보다 더 학생 복음 역사를 섬기기에 좋은 환경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대학교에 남아서 정교수로 일하기 위해 박사 과정을 완전히 끝내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장거리 공부를 하여 현재 Course work는 완전히 끝냈고, 마무리 단계인 논문 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2011년 새해에 모든 논문 작업을 끝내고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노동허가 비자를 얻지 못해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저를 예상치 못했던 대학 교수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선한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현재 저희 가정은 죠지아주의 Savannah 에서 가정 교회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Savannah는 죠지아 주의 수도인 애틀란타에서 5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유서깊은 해안 도시입니다. Armstrong Atlantic State University를 비롯한 5개의 큰 대학이 있으며 Armstrong 대학을 개척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8년 동안의 선교 생활 동안 여러 지역을 옮겨다닌 이유로 (시카고-버팔로-뉴욕시-버팔로-Savannah) 꾸준하게 제자 양성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현재는 Benjamin 형제와 일주일에 두 번씩 1대1을 하며 제자 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크리스틴 선교사님은 양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학교 생활과 학과 공부로 심히 바쁜 저를 힘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이분의 적극적인 도움과 기도가 없었다면 현재의 저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딸 한나도 저 때문에 많은 곳을 이동했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하게 순종하며, 열심히 공부하며, 귀한 믿음의 동역자로 성장해 주었습니다.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되어서 Best의 대학원으로 진학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을 위해서 변함없이 기도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선교 생활을 돌이켜 볼때 저는 마음이 급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가 많았습니다. 빨리 장학금을 받기를 바랬고, 빨리 졸업하기를 바랬고, 빨리 취업 되기를 바랬고, 빨리 자립하기를 바랬고, 빨리 영주권을 받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항상 제가 기대하는 것보다 느리게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늦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일부러 지체하시는 하나님, 스릴을 즐기시는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이제 영주권도 받고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학과 성경을 자유롭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양드립니다.
한마디: 일부러 지체하시는 하나님, 스릴을 즐기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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