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라기 제1강(1.24)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말씀/말라기 1:1-14
요절/말라기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는 “나의 사자”란 뜻으로 BC 5세기 경 에스라,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혹은 그들의 개혁 직후에 사역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말라기 하면 흔히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기억합니다. 그의 사역 후 메시야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약 400년 동안 어두운 시대를 견디게 했던 말씀이 바로 말라기서입니다. 그만큼 어두운 시대를 헤쳐 나가게 하는 중요한 방향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말라기서의 기록연대는 BC538년 바사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포로생활에서 유대로 돌아가도록 허용한 때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후 BC460-430년 사이로 봅니다. 이때는 스룹바벨이 귀국 후 제2성전을 건축한 후 8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무엇보다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선지자의 활동기간이 비슷한 것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말라기서 말씀들이 언급하는 주요 이슈들과 책망하는 죄악들이-예를 들면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것과 안식일과 절기를 준수하지 않는 것, 이방인들과의 잡혼,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 등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사역할 때,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사의 식민지로서 그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1:8). 바사의 왕들이 유대 백성들에게 호의적이긴 했지만 식민지는 식민지였습니다. 그들은 바사의 왕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더구나 이때 유다의 형편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들의 예언과 달리 궁핍하기만 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주변 이방족속들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중단되었을 때, 성전 재건을 독려하며 놀라운 말씀들을 전해주었습니다. 성전을 완공하면 물질적인 번영과 더불어 영적인 축복들이 넘쳐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곡식과 과일 등 소산물이 풍성하며,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접붙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영적인 부흥을 체험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제2성전이 완공되고, 80년이 지난 때에도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풍성한 소출은커녕 가뭄과 흉작에다 황충의 피해를 입어 경제적 궁핍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영적인 부흥도 눈에 띄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보이지 않자 시들어져만 갔습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했습니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유대의 지도층, 특히 제사장들의 죄악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조강지처를 버리는 등 이방 백성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죄악된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 땅 모든 사람들이 신앙의 허무주의, 냉소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말라기서에는 이러한 하나님과 유대 백성들과의 6가지 논쟁이 들어 있습니다. 주로 하나님께서 먼저 문제를 제기하시고 이스라엘이 응답하는 것인데, 그 응답이 매우 시니컬하고 냉소적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약속과 달리 현실은 너무나 고달프고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막가파식으로 막살아서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말라기서는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뿔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심을 깨우쳐 주면서, 모세 언약에 충실한 언약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역설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말씀은 넓게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좁게는 율전의 동역자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두가지 자세, 곧 “사랑과 공경의 자세”를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1-5)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절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경고의 말씀입니다. `경고`란 `맛사`로서 무거운 짐이란 의미입니다. 말라기서 말씀이 언뜻 보기에는 무거운 짐처럼 무겁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주로 죄를 지적하는 회개와 책망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경고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버려두지 경고의 말씀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겁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권면의 말씀으로 달게 받아들이면, 큰 영적 부흥과 성장을 체험할 수 있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말라기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무거운 말라기서 말씀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선포로 시작됨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경고의 말씀도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해석하고 받아 들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I have loved you,"로 현재 완료시제로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사랑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한 영어 성경은 좀 더 쉽게 NLT "I have always loved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쓰인 사랑은 `아하브`란 단어인데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인간 사이 곧 부모와 자녀들 간의 사랑, 사랑하는 연인들과의 뜨거운 사랑을 말할 때 쓰였습니다. 70인 성경은 이 사랑을 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로 번역했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조건이나 상황,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주권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할 수 있으므로 사랑하였노라가 아니라 사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노라의 사랑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죄악된 백성입니까? 그들은 본래 소망없는 애굽의 노예백성이었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으로 교만과 반발심과 원망 불평이 체질화된 백성이었습니다.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탁월한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소망없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선택 속에 출애굽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닌 하나님의 멋진 사랑의 작품이었습니다.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죄악이 가득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삐뚤어진 그들도 불 붙듯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러한 뜨거운 사랑을 받은 족속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시고, 이 사랑에 기초해서 이스라엘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사실 사랑을 잃어버리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랑고백은 어떤 때 하는 것입니까? 한창 사랑이 타오를 때 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때, 새로운 갱신이 필요한 때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관계성의 회복이 필요할 때 하는 것이 사랑고백입니다. 냉기류가 흐르는 부부사이에도 뜨거운 사랑고백은 단번에 관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묘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심정으로 뿔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금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고백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은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응답했습니다. 아까 NLT영어 성경은 더 실감나게 번억했습니다. "Really? How have you loved us?" 이는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원문에 내포된 뜻은 “하나님이 저희를 사랑하셨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해준 것이 무엇인데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이들이 왜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조롱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인 기대가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물질적인 번영과 축복에 대한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단단히 화가 나 있고, 매우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레스 칙령을 따라 바벨론에서 돌아온지도 100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성전과 성벽을 짓고 학자 에스라를 초빙해서 어느 정도 영적 갱신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기대한 특별한 임재의 영광을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느 부분에서도 나타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영광은커녕 현실은 고달프고 미래는 불투명했습니다. 백성은 여전히 바사의 이방인 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사실 80년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거의 400년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영광이나 기적이 거의 기록되지 않은 말씀이 포로기 이후의 말씀들입니다.
이에 비해 유다 백성들은 이방족속인 바벨론에서 보았던 화려했던 문화문명이나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바벨론의 궁중정원은 생각만 해도 기가 질렸습니다. 그 나라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성했습니다. 모두들 빕스에 가서 자주 외식을 즐기고, 좋은 외제차를 굴리고, 철따라 여행을 가고, 메이커가 아니면 옷도 사입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자신들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시커먼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떼워야 했고, 양말은 빵꾸난 것을 꼬매고 또 꼬매서 신어야만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비웃고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우리들도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센터에는 작년 모세의 소천이 도화선이 되어 이런 쓴뿌리를 품고 반발하는 분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들도 나름대로 한다고 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키 위해 때론 몸 단장도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하고 다닐 때도 있었습니다. 직장을 가진 목자님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센터에 와서 영혼들을 돌보며 섬겼습니다. 이번에 학생 연합수양회에 가보니까 학사 사모목자님들도 꽤 많이 따라와서 어린 영혼들과 씨름하며 입안이 헐고 입술이 부르트기까지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이 의사인 사모님들도 꽤 있었는데 험블한 모습으로 열심히 섬기는 모습이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학생들도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레포트도 미루어가며 열심히 주의 역사와 영혼들을 섬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낮은 학점에 장학금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성적표입니다. 부모님도 우호적이지 않고, 교수님이나 친구들도 미쳤다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면 양이라도 잘 자라주기라도 한다면, 모든 슬픔과 고통, 손해의식이 상쇄될 텐데 돌아오는 것은 텅빈 손일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의 건강이나 학업성적도 점차 악화되어 가고, 본인의 건강도 안 좋아질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 따지고 싶습니다. 따지고 싶은 것도 의욕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이것도 오래되면 이제 체념하여 마치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의욕이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어느새 자신의 신앙은 알맹이는 다 빠지고 껍데기와 형식만 남아서 허수아비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냉소적이 되어 갑니다.
이런 이스라엘과 저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의 증거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b,3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물질적인 번영이나 세상에서의 출세를 사랑의 기준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의 증거로 하신 말씀은 선택적 사랑입니다. 바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하고 미워하셨다는 표현은 감정적인 것이 아닌 선택적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문제에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버려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둘째인 야곱보다 첫째인 에서를 선택하고 사랑해야만 했습니다. 에서는 털복숭이로 남성미가 넘친데다 사냥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이에 비해 야곱은 야들야들한데다 때론 이중적이며 사기꾼의 기질이 농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둘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지도 않은 때인 어머니 뱃속에서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뜻을 두시고, 야곱을 통해 주권적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롬9:11-13). 사실 영적으로 보면 둘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누가 우세할 것 없이 그놈이 그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야곱을 택하시고 구원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이러한 선택적 사랑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말할 때만 꺼내야 하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불신자 앞에서는 입도 뻥끗해서는 안됩니다. 그 불신자도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는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에서편에서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처럼 불합리하고 모순된 사랑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적 사랑은 하나님께서 구속역사를 이루어 오시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 시대 많은 사람 가운데 보잘 것 없는 75세의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나 또 탁월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인 12제자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오실 때, 사람을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이루어 오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인간 편에서 그가 잘났고, 못났고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능력이나 학벌, 성품, 도덕성, 곧 죄가 많고 적음의 여부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권적인 선택과 사랑은 인간 편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선택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 택함받아 구원을 받고, 더 나아가 천사도 흠모하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 시대 캠퍼스 목자나 제자로 불러주시고 쓰임 받게 하시는 것, 더 나아가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 모두 하나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랑입니다. 이 모든 데서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추호도 그런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섬길 수 없는 시커먼한 죄인들입니다. 성품도 괴팍하고, 성질도 한 성질합니다.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지혜도 부족하고, 믿음도 없고, 너무 역사를 못 섬겨서 송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데서 하나님의 불가해한 선택적 사랑을 입고 목자와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자유와 구원의 축복, 가정의 축복, 자녀들의 축복, 여러 인간적 영적인 축복들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입지 않았다면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시시하게 돈 좀 못 벌었다고, 자녀가 어떻고 성적이 어떻고, 동역자가 어떻고, 건강이 어떻다고,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시비걸지 마세요. 하나님은 본질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선택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오늘의 나 자신은 없을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가장 큰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분신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아들을 주신 사랑이 가장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가장 큰 것도 주셨는데, 어찌 자잘한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롬8:32).
자녀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지켜봐주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엽습니까? 얼마나 재능이 또한 많습니까? 세상에 대한 욕심, 돈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고 오늘의 자신의 모습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준은 지극히 상대적이며, 세속적이며, 인본적입니다.
4,5절은 선택적 사랑의 증거로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은 둘다 똑같이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회복이 되지만 에돔은 영영 버려지고 황폐화됩니다. 심지어 에돔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에돔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에돔은 아무리 쌓을지라도 결국 헐리게 됩니다. 악인이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헐리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악인의 형통을 인하여 부러워하거나 괜히 열불을 내지 마십시오.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 길을 내주기는커녕 갑자기 습격하여 뒤통수를 치던 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민20:14-21:4). 또한 이들은 야곱족속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훈련을 받을 때 방관하며 희희낙락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높은 바위에 살면서 인간의 교만을 자랑하고, 능력을 의지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오바댜서). 이런 그들은 역사적으로 BC4세기 나바티안 족들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오늘날 요르단에 있는 페트라 유적지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에돔을 눈으로 보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신 분이심을 말할 것입니다(5).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들에 대한 징계가 있지만, 그 징계도 사랑의 징계로서 완전한 멸망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징계를 받아도 택한 족속에게는 사랑의 징계이고 연단이며 훈련이지만, 택하지 않은 자들은 심판이고 멸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적이고 주권적인 사랑을 잘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들로 성장해 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Ⅱ.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6-14)
하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제사장들의 죄악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사표가 되어야 하지만 말라기 당시에는 가장 부패한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첫 번째 논쟁이 사랑의 논쟁이었다면, 이제 두 번째 논쟁은 공경의 논쟁입니다. 제사장들의 제일 첫 번째 죄악은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는 죄입니다. 멸시란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는 죄는 여호와 자신을 멸시하는 죄를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요, 주인이신 하나님을 도무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아들은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무리 부족해도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누시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양육하고 훈계해오신 아버지를 공경합니다. 또 종은 형편없는 주인일지라도 그의 눈치를 보며, 한결같이 주인을 두려워하고 공경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자 주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과 주인의식으로 노예 백성 이스라엘에게 쓸 것과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고, 말씀으로 양육해오셨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공경`이란 영어 성경은 honor로서 매사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존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두려워하는 것`은 적절한 존경을 드리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아버지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심히도 멸시하는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죄악을 저지르고도 저지른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며 하나님께 반발했습니다. 이들은 그만큼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었고, 죄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무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에게 주의 이름을 공경하지 않은 증거로 내놓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러운 떡입니다. 나아가 흠있는 희생제물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떡은 제사장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따끈 따끈한 새것으로 교체해야 하는 진설병을 말합니다. 레위기에 보면, 진설병을 포함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는 아무 것이나 드리지 말고,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최상의 것을 드리도록 했습니다(레22장). 그런데 이들은 최상의 떡이 아닌 곰팡이가 핀 떡, 쉰 떡, 오래된 떡과 같은 더러운 떡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첫 곡식이 아닌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어쩌면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곡식이나 강탈한 것으로도 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처럼 더러운 떡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며 얕잡아 보고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들의 멸시는 제물에도 나타났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레위기에 보면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희생제물은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합니다(레22:22-25). 이러한 것을 드리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따라서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 또한 죄악된 일입니다. 그들은 최상의 것, 좋은 것은 자신을 위해 아껴 두었다가 먹거나 시장에 내다 팔아서 치부를 했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것, 있으나 마나한 것,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만 골라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총독`은 바사의 지방 관리를 말합니다. 그럴 때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인간에게 드려도 굉장히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께 인색하게 때로는 엉망으로 드리면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9).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죄악된 행위들을 심각히 보시고 도전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너희가 내 제단에서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도록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식의 제사를 드리려면 차라리 센타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이들의 손으로 드리는 제물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말씀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또 얼마나 공경하는 자세로 섬기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 시대의 제사장들입니다. 신앙연수가 많아질수록, 목자의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나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존경을 받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들의 삶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예배드리는 시간도 아깝거나 귀찮은지 항상 늦게 나타납니다. 게다가 얼마 안가서 졸고 있습니다. 이것은 곰팡이가 핀 떡을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전의 저희 조상들은 십의 이조를 드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피까지 팔아서 드리는 스피릿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십일조를 드려도 자신이 먼저 쓰고 남은 것을 드립니다. 그러나 보니 항상 뒤에 내거나 아예 빼먹기도 합니다. 이는 쉰 떡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께 드리는 물질에 감사와 헌신의 마음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감사제목 기도제목도 없이 귀찮다는 듯이 던지듯이 헌금을 합니다. 인간인 제가 보기에도 참 민망합니다. 직장 상사나 부모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새벽기도 메시지를 맡고도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펑크를 내거나 심지어는 대독을 시킵니다. 사정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별로 좋지 못한 자세입니다. 메시지에 크고 작은 메시지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메시지는 모두 큰 메시지로서 깊은 경외심 가운데 말씀을 준비하고 전해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걸핏하면 기도모임이나 각종 모임을 빠져서 그야말로 모임에 김을 뺍니다. 이런 모습은 모두 쉰 떡, 곰팡이가 핀 더러운 떡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축복하소서,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주소서`한들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과 긍휼을 구하고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베스트를 다하여 공경하는 자세부터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공경하는 자세 없이 무엇을 주께 얻을 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더러운 떡을 드리는 자들을 폐하시고,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주의 이름을 크게 하실 것입니다. 각처에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제사장들은 이런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며 주의 이름을 멸시했습니다(12). 더구나 이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정규적인 제사까지도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번거롭게 여기는 것`은 귀찮고 짜증스럽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과 같은 봉헌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이들의 손에서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이들은 하나님께 서원하는 일에도 흠있는 것으로 속여 드렸습니다. 이들에게 정상적인 제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짐승 떼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만한 튼실한 수컷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4b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큰 임금이란 a great king으로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위대하신 만왕의 왕이심을 말해줍니다.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역 안에서만 머무시는 지역신 정도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온 천하 만물 가운데의 위대하신 왕이십니다(5).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구속하신 구주가 되십니다. 본문에는 또 만군의 여호와란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the Lord Almighty God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 힘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해줍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마땅히 공경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길 분이 아니십니다. 이 하나님을 2016년 한 해 두렵고 떨림으로, 사랑과 공경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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