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율전 UBF 2016년 사도행전 제1강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믿음의 종 2016. 2. 27. 15:29

2016년 사도행전 제1(2.21)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사도행전 1:1-26

요절/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금년 65일 주일에 한국의 장충체육관에서 세계선교 보고대회와 이어서 34일간 선교사 수양회가 열립니다. 선교열기가 시들해져 가는 이 때에, 한국에서 개최되는 선교 보고대회와 선교사 수양회는 많은 은혜와 도전과 비전, 그리고 열매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준비로 한국은 봄 학기에 사도행전 말씀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AD70년 사도 바울의 충성스러운 동역자이자 의사요, 역사학자, 복음증거자였던 누가가 전편인 누가복음에 이어서 쓴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책 이름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을 중심으로 복음행전이라고도 하고, 복음전파의 주체가 성령이란 점에서 성령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인간 사도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됨으로 사도행전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 모든 내용을 담아서 사도들과 다른 초대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그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복음 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수신자와 저술목적은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데오빌로 각하 한 사람을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데오빌로가 실존인물인가 하는데 대한 논의가 있는데, 로마 식민지의 최고 통치 지도자를 가리키는 `각하`라는 칭호가 붙는 것을 볼 때, 역사적인 실존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한사람을 위해서 방대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저술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친구란 뜻처럼, 초대교회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역사적인 뿌리와 확실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저술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많은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먼저는 기도란 단어가 32회 나올 정도로 기도가 강조되어 나옵니다. 이러한 기도의 뿌리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이란 단어가 58회 반복될 정도로 성령에 관한 교훈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복음적인 성령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부터 교회의 권세, 교회의 사명 등 교회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살아 역사하십니다.

또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간섭의 역사가 두드러집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로 교회와 증인들을 보호하시고, 천사와 지진, 기적과 능력을 통해 복음이 효과적으로 증거되게 하십니다. 또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천상통치를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주의 말씀의 확장과 권세에 대하여, 말씀이 흥왕한 곳에 숫자적인 부흥도 따르게 됨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증인과 증인들의 고난에 대하여, 또 이방인들이 어떻게 회개하고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행전은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고 확장되었는가? 또 교회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 성령강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자들과 사도바울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등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전통적인 내용구분은 1:8절에 근거해, 1-7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의 복음 확장을 말하고, 8-12장은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13-28장까지는 땅 끝인 로마에 이르는 복음의 여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1강에서는 새 시대,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앞두고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앞두시고,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성령 충만함으로 준비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오늘 저희들도 봄학기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앞두고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5)

 

1,2절은 사도행전의 전편인 누가복음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여기서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은 무릇 예수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이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성령으로 명하시고라고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서에는 잘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 그 모든 사역에 항상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셨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제 앞으로의 사도행전의 역사가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실 역사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3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가장 힘써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주동사는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어떤 확실한 많은 증거가 있었습니까?

먼저 신약의 기록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0번 정도 나타나셔서 그의 부활을 친히 증거했습니다(28:1-10; 16:9-18; 24:13-50; 20:11-23; 26-29; 21:1-23; 고전 15:5-8). 특히 예수님은 당시 영의 부활을 생각하는 이단 사상에 맞서 몸의 부활을 많은 증거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시기도 하고,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손과 발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24:37-43).

 

사도행전은 이처럼 십자가의 고난보다 부활을 더욱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2:24,31-32, 3:26, 4:2, 5:30, 13:30, 17:3, 18:31). 왜 이처럼 부활을 강조할까요? 그것은 부활신앙에 기초한 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천상에서 계속 주와 그리스도로서,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심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행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행전은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도 지금도 살아 역사합니다. 히브리서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지금도 천상에서 살아 역사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께서 이루신 복음을 믿을 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신앙을 힘써 증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3b).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종국에는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하신 나라입니다(1:15). 이제 유대인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받아들일 때, 그의 내면에는 의와 평강과 행복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힘있게 임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내용을 40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배운 것은, 그동안 제자로서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총 정리하는 확실한 복습기간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사도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는 눅24:47-49절을 다시 풀어서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예수님께서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아주 끔찍하고 소름이 돋는 도시였습니다. 거기에 지금도 유대인들의 핍박이 드세게 가해지는 두려움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실패와 두려움의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떠나는 대신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실패하고 두렵다고 해서 떠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그 실패와 두려움의 현장에서 다시 털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털고 일어나서 극복하지 않으면, 또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곳으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24:47).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다윗 왕 때부터 하나님이 계신 시온성으로, 또 솔로몬 왕 때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곳입니다. 또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서 복음을 완성하신 곳으로서 복음의 터요, 진리의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더욱 이런 역사적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떠남의 유혹에 대한 최후의 처방은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령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으로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모든 약속을 이루는 성령을 말합니다. 또 약속의 성령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주의 백성이면 모두 받을 수 있는 성령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령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얼마나 신나며, 얼마나 존귀한 일입니까? 실로 약속의 성령의 받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역도, 제자의 존재의미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5절은 이러한 성령을 받는 것을 요한의 물세례와 비교하여 말합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회개의 표시로서 주는 세례로서 하나의 의식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세례 자체로는 결코 죄 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입니다. 요한의 물세례가 의식이자 상징이라면, 예수님의 성령세례는 그 의식의 `내용`이자, 상징이 가리키는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세례의 수종자에 불과했다면, 예수님은 세례의 주인인 셈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만큼은 분명합니다. 본래 세례란 원어 밥티조로서 물에 푹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다, 전념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이 단어 자체에 풍성함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성령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푹 잠기듯이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그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이러한 성령세례에 충만함과 풍성함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동의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는 단회적인데 비해, 성령충만은 반복적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반복적으로 나옵니다(2:4,4:31,6:5,8:17,9:17,10:44,45..). 그러나 성령세례라는 개념 안에 벌써 풍성함의 의미가 들어있음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의 개념이 내주하시는 성령세례라면 더욱 풍성함의 의미는 배가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제자들과 우리들의 형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가져와 적용하기는 매우 무리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그러합니다(3:3,5). 우리는 중생과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성령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들이 이미 중생 곧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거듭난 것으로 나오지요. 제자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표해서 고백한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16,17). 고전12:3절에 보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로 보면 제자들 안에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리켜 이미 말씀으로 깨끗한 자들이요(15:3), 이미 목욕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10).

 

이로 보면 제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다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를 아직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천상에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베푸시는 세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는 내주하시는 성령세례로서 제자들 안에 내주하셔서 온갖 귀한 성령의 역사를 다 이루어주십니다. 내주하심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5:5). 또 성령님은 새 언약의 영으로서 제자들의 마음을 새롭게, 부드럽게 하십니다(31:31-33, 36:25-27).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제자들 안에 내주하시면서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성령의 은혜와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나아가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가진 자로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산 소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중간지대에 있는 자들로서 매우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거듭났지만 성령충만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이나 담대함도 없어서 자꾸 도망가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의 삶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가 정말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받을 때 놀라운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6-26)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다시 모였을 때,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는 다윗왕국처럼 지상의 모든 나라 가운데 우뚝 서는 정치적인 나라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나라를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세우고, 그 나라에서 권력자로서 폼나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도 어디까지나 여전히 인간적이며, 정치적이며, 정욕적입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권력욕, 물질욕, 명예욕 등 근본 탐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나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등의 `때와 시기`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의 권한입니다. 이러한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바 아닙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이 말씀은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종해야 할 마지막 명령입니다. 이 마지막 명령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입니다(8a). 여기서 `오직`이라는 말이 제일 앞에 강조되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같은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 제자들이 해야 할 오직 한가지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권능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5절의 성령세례를 8절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곧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권능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능력을 말합니다. 곧 증인을 증인되게 하는 능력으로서 말씀을 은혜롭고 담대히 전하는 능력, 전하는 말씀의 보증으로서 권능을 행하는 능력, 기도가 강력해지는 기도의 능력, 모든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의 능력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권능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으로는 안되고,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특별히 오늘날은 죄로 인해 망가지고, 악령에 시달리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때문에 더욱 더 특별히 권능있는 예수님의 증인들이 많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3:15).

 

둘째,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입니다(8b). 이는 증인으로서의 범위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범위는 이제 좁은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자체가 좁은 이스라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세례로서 범세계적이며, 우주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편협한 유다이즘을 깨야만 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국수주의적이며 정치적, 인간적인 생각들도 모두 버려야만 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온 열방이 선교대상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가서 감당해야 할 유일한 사명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을 광내라고 존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제자의 꿈에도 소원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무엇입니까? 증인은 보고 들은 바를 가감없이 그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들은 바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인이 어렵고, 증인이란 말만 들어도 부담을 느끼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보고 듣고 체험한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거듭남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또 증인이란 말은 헬라어 `마르튀스`인데 여기서 순교자(martyr)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는 순교의 자세를 가지고 증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합니다. 이를 위해 연구도 해야하고, 논문도 부지런히 써야 합니다. 건강을 염려하면서까지 힘든 회사 일도 감당해야 합니다. 취직도 해야 하고, 시험준비도 잘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결혼문제도 시급하고, 학문도 잘 감당하고, 자녀양육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서 `오직` 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떤 경우에나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의 삶은 모든 문제에 앞서서 감당해야 할 유일한 한가지입니다. 그것도 권능있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신나는 일입니다. 새내기들이 몰려오는 요즈음 이러한 권능있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기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9-11절은 예수님의 마지막 승천장면을 자세히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11b절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승천 방식이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의 방식이시라는 것과 승천하신 예수님은 곧 재림하실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재림하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을 그대로 가지고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에 알맞은 길이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로 1를 제한했습니다. 저자 누가가 이 말씀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뿐만 아니라 승천하심이 안식일 곧 주일에 일어났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들어가 유한 곳은 다락방이었습니다(13a). 다락방은 upper room으로서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널찍한 이층방을 말합니다. 이 방에 120명이 넘게 들어간 것을 보면 저희 센타 만큼의 아주 큰 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사도가 다 거기 있었으며,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들로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입니다(24:10).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에 무관심하거나 방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변화되어 이제는 열심히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기도는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도가 어떠했습니까? 첫째로, 단체기도였습니다. 11사도가 다 거기 있었습니다. 이들 중 자신의 일로 낙오자나 빠진 자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이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기도회 형태의 기도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로, 마음을 같이하는 합심기도였습니다. 14b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하는 기도, 곧 합심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18:19절에서 합심기도의 위력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합심기도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고, 부흥의 역사가 있습니다. 율전에 다나목자님과 브리스가 목자님이 새벽기도 때마다 합심기도를 하는데서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셋째로, 오로지 기도였습니다. 오로지 힘쓰더라(프로스칼텔레오)”는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기도를 묘사할 때 쓰이는 단골 메뉴로서 무슨 일에 종사하다, 바쁘게 힘쓰다, 헌신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전심전력하는 기도로서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여자들과 모인 무리 120명의 성도들이 밥 먹고 잠자는 일 외에는 오직 한가지 일, 곧 기도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며 힘썼음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기도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도를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일상적으로 항상 기도하셨습니다(1:35).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를 들어 사도를 택하시고 부르실 때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6:12).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교훈이 많습니다. 강청기도(11:5-9), 원한 맺힌 과부의 기도(18:1-8), 주의 기도(11:1-4),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는 겟세마네 기도(22:41-44)가 그러합니다.

제자들도 복음서에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라하면 잠자기 일쑤였고, 딴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본받아 기도에 전심전력했습니다. 교회가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먼저 교회 지도자들이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11사도가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 유력한 여인들이 나옵니다. 교회는 소수의 기도의 정예부대들이 먼저 본을 보이고, 그런 기도가 확산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의 정예부대는 누가 되어야 합니까?

율전은 저와 풀 타임 목자들, 그리고 요회 목자님들이 먼저 앞장서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니어 주니어목자까지 기도에 올인해야 합니다. 새벽기도가 개인기도 합심기도에 좋다면, 금요 기도회는 단체 기도에 좋습니다. 목자님들은 모두 나와서 단체로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회의나 토론을 하기보다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봄학기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정말 목이 메도록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는 목이 메어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들이 많아져 기쁨이 되었습니다.

 

제가 요사이 동역자 브리스가목자로부터 기도에 관한 상당한 푸쉬를 받고 있습니다. 예전만큼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고 들들 볶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와서도 기도는 안하고 말씀연구하고 있다가 뭐라 합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기에 정확한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습니다. 30분 기도한다니까 스탭이 그 정도 기도하냐고,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1시간 30분 기도하라고 성화가 대단합니다. 제가 좀 더 기도에 전념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양이 아닌 리더들과 자녀들 속에 어려운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사인입니다. 선봉 요회에 어려운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것도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사인입니다. 서은혜, 다놓사, 코이노니아 목자들도 왜 기도의 자리에 안 나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없이 무엇이 잘 되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매우 교만해지고 부유해져서, 종국에는 아주 망하기 때문입니다. 새 봄학기 앞두고 정말 우리가 회개하고 기도에 전념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15-26절까지는 사도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뽑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의 그릇을 이루어 합심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유다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유다의 배반처럼 어려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초해서 해석을 잘하고, 무엇보다 성령의 그릇을 이루어 합심기도에 힘쓸 더욱 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시대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은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충만함에 이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우선 3가지에 힘써야 합니다.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성령충만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은 죄악들을 철저히 회개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로 충만케 하시고, 우리 안에서 활발히 일하십니다.

둘째,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5:18, 3:16).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도우십니다. 6:32절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가 잘 안되기 때문에 회개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잘 되지 않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또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을 의지하기 위해서도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회개하며 순종하며 성령님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비밀은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이 약속한 성령을 받아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생명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