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요한복음 제1강(3.7)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말씀/요한복음 1:1-18
요절/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10년 봄학기에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로 공관복음과 다릅니다. `요한신학 렌즈로 본 요한복음`의 저자인 김동수 교수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어린이와 코끼리가 동시에 수영할 수 있는 곳은 없을까? 아마 세상에서 이런 수영장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란 풀 속에서는 기독교 입문자도 수영할 수 있고, 또 그 속에 담긴 심오함으로 인해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헤엄을 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초신자가 처음 찾는 것도 요한복음이요(어린이 복음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분이 다시 한번 깊이 공부하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수수께끼 복음서). 그만큼 요한복음은 쉬우면서도 매우 심오하고 어려운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1C말 인류에게 주신 놀라운 말씀으로 두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으로서, 이 두 권은 성경66권의 가장 말미에 기록된 책입니다. 이 두 말씀은 모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AD90년경 에베소에서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고, 계시록은 AD95년경 밧모섬으로 유배된 사도 요한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요한공동체나 초기 성도들이 싸워야 할 두가지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유대인 세력이고 또 하나는 로마 세력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요한복음이나 계시록이나 가장 악명 높은 도미티안 황제 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과의 싸움은 `누가 구약을 계승한 적자인가?` 하는 신학적 논쟁을 나았고, 로마 황제와의 싸움은 `누가 주와 그리스도인가? 황제인가, 예수님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낳았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50번 이상 유달리 많이 나옵니다. 공관복음은 5,6번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도 호의적이기 보다는 적대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말해줍니다. 이 상황에서 유대교의 전통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갖게 하는 복음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의 기독론은 예수님의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유명한 `에고 에이미(I am...)`, `나는 생명의 떡, 선한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 진리 생명, 참 포도나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요한복음이 유대인만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는 이방인(헬라인) 전도가 폭발적으로 많이 일어나는 때였습니다. 이 때 전도용으로 주어진 말씀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헬라의 이원론에 입각한 설명도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위와 아래, 빛과 어두움, 참과 거짓, 영과 물질, 진리와 현상, 로고스 기독론 등이 모두 헬라적 사상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종합해서 본 요한복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믿음의 책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동사가 98회 가장 많이 반복됩니다. 명사는 단 한 번도 사용치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요한복음이 역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을 기대하고 쓰여졌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하는 독자들도 믿음을 갖고, 믿음을 고양시키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기록목적을 쓴 20:31절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도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믿음으로 현재적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고, 믿음으로 미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영원한 삶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주제로 나옵니다. 실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입니다. 여러분, 꼭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고, 그래야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역사합니다.
둘째, 선교의 책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이방인 전도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대 성경은 두루마리나 코덱스 형태에다가 가격도 비싸서 도저히 가지고 다닐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모든 핵심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책으로 요한복음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세계 어느 민족, 어느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우주적인 복음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구약 모든 성경을 압축하고, 기획해서 내놓은 최고의 작품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셋째, 계시의 책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가 가장 잘 계시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개와 증거로 가득합니다.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아가고, 이 분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과의 만남이 실제적인 사건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넷째, 생명의 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생명입니다. 기록목적에도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생명`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신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맛보고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은 일차적으로 헬라인(이방인) 독자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세상 만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녹아있습니다. 또한 유대인 독자들을 위해서도 쓰여졌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라 함은 개종된 유대 그리스도인을 의미하기도 하고, 아직 예수님을 영접치 않은 불신자 유대인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로서 구약을 대체하는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이 예수님은 구약을 대신할 수 있는 새 포도주, 새 성전, 새로운 생명의 떡, 새로운 부활 생명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 서론으로서 프롤로그에 해당합니다. 이 서론은 요한복음 전체를 포괄할만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아주 의미심장하게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헬라인과 유대인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Ⅰ. 창조주 예수님(1-3)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고대 헬라의 철학자들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물, 불, 흙, 공기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헤라클리투스라는 철학자는 우주가 `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증거는 모든 것들이 불처럼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과 네 원소 중 가장 빨리 움직이는 것이 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유동하는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우주적 법칙이 있는데, 헤라클리투스는 이것을 바로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주전 300년경 태동한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그러므로 1a절의 말씀인 헬라어 `로고스`라는 단어는 우선 헬라 철학자들의 기술적 용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번역하면 “우주적 이성, 우주 만물의 근본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헬라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을 로고스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로고스, 로고스 하는데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곧 로고스 기독론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로고스 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에 대한 공부)은 유대인들에게도 익숙한 개념이었습니다. 구약의 고대 아람어(히브리어 방언, 고어체) 역본인 탈굼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을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야훼), 지혜`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로고스란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고스 기독론으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로고스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로고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1). `함께`라는 헬라어 전치사도 단순히 공간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메타`와 인격적 교제 가운데 친밀함을 의미하는 `프로스`가 있습니다. 부부가 친밀함이 없이 함께 존재하는 것, 부부싸움을 하고 각방을 쓰면서 함께 있는 것이 메타이고, 대화 속에 친밀함 속에 있는 것이 프로스입니다. 여기서는 프로스란 단어로 쓰였기에, 이 말씀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성을 말해줍니다.
2절은 1절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로고스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1,2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로고스로서의 예수님의 선재성과 신성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크리스마스 때부터 존재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생일인가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부터 존재하셨나요? `태초에`입니다. 이 말은 `영원무궁한 때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로고스로서 존재하셨다는 것은 말해줍니다. 그러면 생일이 없잖아요. 모든 만물이 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존재하셨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심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만물과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실 뿐만 아니라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때 성부이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동역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사역의 동역자이십니다. 그래서 구약학자인 숭실대 김회권 교수는 창세기 1장을 해설해 놓은 것이 요한복음 1장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창조주로서 왕이시자 주인이십니다. 이런 말을 하면 새내기들이나 아직 신앙이 없는 분들은 매우 당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입니다. 그게 진리입니다. 원인없이 존재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존재케 한 근원적 진리, 변함이 없는 진리이신 로고스로서 창조주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의미는 그 분을 떠나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야 나의 존재의미도 살아납니다. 살아갈 기쁨과 소망과 이유를 발견합니다. 비로소 자부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두만강 흐르는 물처럼 그저 세월따라 흘러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연히 왔다가 그럭 저럭 살다가 죽어가는 우연의 존재가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필연의 뜻 가운데 창조하신 최고의 걸작품들인 것입니다. 무엇이든 만드신 것에는 만든 이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마이크는 왜 만들었습니까? 자동차는 왜 만들었습니까? 그러면 사람은 왜 만들었습니까? 나는 왜 태어났습니까? 한 번 고민해 보세요.
창세기 1:31a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아끼시고 사랑하는 존재들입니다.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닙니다. 예뻐서가 아닙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인간조건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존재 자체로 기뻐하시고 자랑하십니다. 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다스림을 받아 보십시오. 거기에 천국이 임합니다. 새로운 삶, 행복한 삶이 펼쳐집니다. 이 은혜가 봄학기에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Ⅱ. 생명의 빛 예수님(4)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빛이십니다. 1절의 로고스가 생명으로의 로고스, 빛으로의 로고스로 발전되어 나갑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생명도 여러 가지죠. 먼저 육체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푸쉬케입니다. 이 생명은 낡고 후패합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눈도 안 보이고, 소화도 되지 않습니다. 머리칼도 희어집니다. 주름이 늘어납니다. 뱃살도 보기 싫게 축 쳐집니다. 얼굴에는 검은 버섯이 핍니다. 나이가 3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피부는 주글 주글 노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생명`, `조에로서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 생명은 우리에게 빛이 됩니다. 빛은 에너지원이죠. 예수 안의 생명이야말로 참된 에너지원으로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 활동시켜줍니다. 이 생명을 가진 자는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롭습니다. 독수리의 비상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 안의 생명이 들어온 자는 즉시 영생합니다. 영생은 산삼을 먹고, 불로초를 먹고, 복제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휘트니스에 가서 종일 산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건강은 예수 안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왕노릇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안의 생명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기쁨을 주고, 소망과 꿈을 줍니다.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고, 스피릿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내가 무기력하고, 아무 꿈과 소망도 없는 것은 예수 안의 생명이 없거나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안의 생명이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소망이요, 빛이 됩니다. 봄학기 생명의 빛 예수님께서 어두운 영혼에 들어오셔서 모두의 빛이 되고, 소망이 되고, 의미가 되고, 꿈이 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Ⅲ. 로고스가 육신이 되신 예수님(14)
14절을 또 함께 읽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절의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습니다. 살과 피를 가진 육신이 되었습니다. 이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에 오셨다. 우리는 그 영광을 두 눈으로 보았다. 단 하나뿐인 그 영광은 아버지 같고, 아들 같아서 안팎으로 두루 충만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참된 영광이었다”
태초부터 존재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까? 왜 그렇게 오셨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또한 가장 큰 사랑 중의 사랑이요, 가장 큰 희생 중의 희생, 가장 큰 겸손 중의 겸손입니다.
육신이 되신 로고스는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먼저 존재가 우리처럼, 육신을 가진 인간처럼, 살과 피를 가진 인간처럼 바뀌어야 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존재는 커녕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불평 불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장막이 왜 이처럼 지저분하고, 왜 반찬이 없느냐? 고 불평합니다. 잠자리가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환경 정도가 아니라 존재가 바뀌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자기부인과 겸손과 희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가 변하여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모습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왜 육신을 입고 오셨을까요? 육신을 가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낮아져 오셨습니다.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여기서 `거하시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에스케노센`으로서 `장막`을 의미하는 `스케노`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거하시다`는 본래 뜻은 `장막을 치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을 텐트 삼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의 절정입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장막으로 오심은, 구약에서 성전을 통하여 임재를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의 성취입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구약 성전을 대체하는 새 성전, 새 성막되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유대인들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옛날 유대인이라면 너무나 잘 이해할 것입니다. 그것도 감격해 가면서요. 이제 건물로서 성전이나 그 많은 제사나 피흘리는 제물이 필요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낯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런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말씀을 보세요. 당연히 이 예수님에게 무엇이 나타나겠습니까? 그것은 신성으로서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그 옛날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을 때, 구름 속에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성막에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구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이제 이 임재의 영광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안에 충만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죽은지가 나흘이매 시체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죽은 왕의 신하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중풍병자, 문둥병자를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예수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이는 출34:6절의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의 성취입니다. 충만했다는 것은 흘러 넘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 위에 은혜, 두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구약의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카린 안티 카리토스, 여기서 안티를 instead of로 보는 것) 뜻과 둘째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은혜`(카이를 more로 보는 것)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은혜로 그치지 않고, 하나의 은혜가 있은 후 더욱 큰 은혜가 몰려온다는 뜻입니다.
어느 것이나 무방하나 그 뜻은 분명합니다. 성막이나 모세를 통해 주신 구약의 은혜도 크고 놀랍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약의 은혜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었습니다. 자꾸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는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한 번 은혜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계속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를 14,16절에서는 `충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흘러넘치는 충만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와 제사장의 사역을 덮고 남는 놀라운 은혜의 연속입니다. 요한복음을 새롭게 공부하면서 우리 안에 이 예수님의 은혜가, 은혜 위에 은혜로서 흘러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세례요한처럼 열심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깨닫지 못하더라`는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빛에 대한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요한은 이 빛에 대한 증거자로서 이 땅에 왔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세례 요한의 증거가 교차되어 나옵니다. 6-8절, 15절이 세례 요한에 대한 증거이고, 나머지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입니다. 세례요한의 증거 부분은 사실 1장에서 모두 삭제해 버려도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이 삽입구로 들어감으로서 단절되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럼에도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는 가장 큰 인물입니다. 또한 구약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신약을 연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구약과 신약이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면, 그 요한을 신뢰하는 자들은 모두 로고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습니다. 이 요한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생명의 빛을 얻고, 은혜를 덧입고,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영접의 중요성입니다. 9-13절은 세례 요한의 증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거부와 영접입니다. 이 두가지가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나지요. 먼저 거부입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참 빛, 진정한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교만한 지성인 니고데모, 지저분한 사마리아 여인, 38년된 쓸모없는 중풍병자, 날 때부터 소경된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그녀, 죽은 나사로, 수많은 유대인 등등 33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인격적으로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어떻습니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초라한 겉모습만 보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습니다. 더 이상 관심을 두려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땅, 자기 백성 곧 유대 땅 유대백성들에게 오셨으나 영접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3,4) 이러한 거부가 요한복음 12장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렇게 거부하는 자들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그런 자들에게는 어떤 축복이 주어집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들은 근본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지고,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정은 육체의 정욕이고, 사람의 뜻이란 사람의 의지나 계획, 바램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차원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 이름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근본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권세란 `자격과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로서의 모든 권리가 다 주어집니다. 기도할 수 있고,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유산)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새 영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모두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는, 성육신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동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에게서 은혜를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아무런 구원의 은혜, 죄 사함의 은혜, 사명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육신의 은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짐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존재는 바뀔 정도가 아니라도, 낮아져 함께 하는 성육신의 진리를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때 자신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고상한 위치로 높아져 있지는 않습니까? 장막생활이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나이어린 후배들하고 어울리기가 쉽지 않습니까? 낮아져 섬기기가 어렵지는 않습니까?
재충전을 위해 다시 신학을 좀 깊이 하고자 하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몸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역사를 섬기면서 공부하려니 몸이 피곤합니다. 오리엔테이선을 해보니 학습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각 과목당 600페이지 독서와 북리뷰를 요구합니다. 매 시간 시험과 레포트 제출로 정신이 없습니다. 에스더 목자 말대로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부담감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학생의 신분으로 낮아져 공부하니 새로운 은혜가 있습니다. 스피릿이 살아납니다. 공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쉽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새 학기 한 주를 보내면서 모두 고생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덧입고, 인내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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