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요한계시록 제 13 강(2.7)
달콤함과 쓰라림
말씀/요한계시록 10:1-11
요절/요한계시록 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와 부활, 고난과 영광의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아직도 사단의 무리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저들은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더욱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란을 일으킨 쿠데타 세력들이 점령군이 되어 일시적으로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다 인간 안에 내재된 꿈틀거리는 욕망은 항상 인간을 고난과 파멸의 길로 내몰아 가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당하는 많은 환난과 고통은 스스로 초래한 경우가 많습니다. 과도한 목표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인간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이유없이 당하는 고통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는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환난과 어려움이 지나고 나면, 찬란한 영광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유가 아닌 버림으로, 높아짐이 아닌 낮아짐으로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또 몸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입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얻으려 일부러 고난을 자취할 필요는 없지만, 고난없이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진리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이유는 확실한 천상의 세계, 하늘 보좌의 영광스런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어두운 이 땅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자주 이 하늘의 영광스런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계시록은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어디라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 땅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계엄군과 같은 사단의 쿠데타 세력들을 몰아내기까지 치열한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성도들이 이 땅에서 받아야 할 고난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성도들이 받는 고난과 환난은 궁극적으로 죄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성도들이 힘써 싸우지 못하도록, 믿음의 길을 포기하도록, 또 죄와 탐욕의 길로 가도록, 넓은 길로 가도록, 때론 달콤함으로 유혹하고 때론 고난과 어려움으로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10,11장은 여섯째 나팔 재앙과 일곱째 나팔 재앙 사이에 들어있는 삽입장으로서, 두 번째 중간계시에 속한 말씀입니다. 일곱째 나팔 재앙은 일곱 대접 재앙으로 옮겨 갑니다. 그런데 계속 재앙의 말씀만 전하면 힘이 드니까, 성도들을 위해서 삽입장으로서 다른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큰 역사의 흐름은 재앙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 성도들의 형편은 어떻게 되는지, 계속 역사의 초점을 성도들에게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환난의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입니다.
오늘 계시록 10장은 두 장면이 교차되어 나옵니다. 그것은 하늘의 힘쎈 천사의 영광스런 모습과 지상의 고난 당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10장 말씀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왜 그렇게 장황하게 하늘의 힘 센 천사의 영광을 보여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이 장면이 사도 요한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말씀을 묵상할 때 계속 생각되었습니다. 또 하늘에서 부르짖는 천사의 우레와 같은 소리는 기록하지 말라고 하시다가, 뒷부분에서는 두루마리 성경을 아예 갖다 먹어버리라는 대조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10장에서 중요한 것은 하늘의 힘센 천사가 가진 작은 두루마리 성경책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책으로서 인류의 모든 미래의 역사가 다 들어있는 책입니다. 처음에 이 책은 인봉되었으나 이제는 펼쳐진 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보고 들음으로 그 안에 기록된 책의 내용을 잘 알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자세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말씀을 전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인간 쪽에서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할 길이 제시되어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멸망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죄악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참고서 정도의 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도 잘 변하지 않는 이유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루마리 책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책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들부들 떨면서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늘의 환상은 이 말씀의 권위와 확실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 말씀은 이미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힘 센 천사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가 가져다 먹고 가서 전해야 합니다. 그 일은 달콤함과 쓰라림이 교차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놀라운 영광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힘센 천사의 영광이 어떠합니까? 10:1절을 보십시오. 그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는 이 천사가 단순한 천사가 아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가진 천사임을 말해줍니다.
그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았습니다. 무지개는 언약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로 죄악된 인간을 심판하신 후 다시는 땅의 홍수로 멸하지 아니하리라는 보증으로 무지개 언약을 주셨습니다. `얼굴이 해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천사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말합니다. `발이 불기둥 같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불기둥처럼 보호와 인도를 말하고, 대적들에게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불기둥 다리로 걷어 차거나 밟아 버리면, 다 타고 재만 남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힘 센 천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천사의 신적 영광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만큼 천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같은 말과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천사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 성경 책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두루마리 성경책이 펴 놓였다`는 것은 이미 계시된 내용으로서, 읽으려거나 알려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읽고 공부하는 계시록 말씀은 이 두루마리 성경책을 풀어 놓은 것입니다.
또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있었습니다. 이는 천사의 강한 영향력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다와 땅으로 상징되는 온 세계입니다. 힘 센 천사와 그가 가진 작은 두루마리 성경책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진리요,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미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인류가 겪게 될 모든 예언의 말씀이 이 두루마리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루마리 성경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확실하게 이루어질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천사는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동물의 제왕 사자가 한 번 `어흥`하며 울부짖으면, 산천초목과 그 안에 있는 짐승들이 다 두려워 떨게 됩니다. 그 울음 소리의 파장이라는게 무시 무시합니다.
동시에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했습니다. `우레`란 천둥소리를 말합니다. 그 우레도 한가지 색으로서의 소리가 아니라 제 각각 특색있는 일곱 천둥소리를 냈다는 것입니다. 이는 천사의 메시지를 일곱 천둥 소리로 되받아 더 크게 소리친 것을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산에 올라가서 `야호`하고 소리치면, 그 소리가 여러 개의 소리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울부짖는 사자 소리요, 일곱 천둥소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강력하고 다양하고 힘있고 능력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시시한 말씀이 아닙니다. 힘없고 나약하며 무능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것도 일곱 천둥소리로 되받아 나오는 것처럼 아주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였던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씀을 전할 때 이런 일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가 단에 올라가서 한 번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은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가 눈 앞에서 쩍 벌리고 있는 듯한 환상으로 두려워 떨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천둥소리와 같은 능력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사도 요한이 이 엄청난 말씀을 기록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록하지 말고, 그대로 비밀로 두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또 다른 자세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밀로 두라고 할 때는 더 이상 알려하지 말고, 비밀로 두는 자세입니다. 성경이 가는데까지 가고, 멈추는데서 멈추는 자세입니다. 사실 모든데서 제한된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다 알 수 없고, 알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비밀이나 부활과 심판의 비밀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비밀도 제대로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이 알려주는 한도 내에서 제한적으로만 알아 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밀로 두라는 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다 필요하다 싶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려주시고, 기록하라고 하기도 하십니다. 또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기록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제 말씀하신 내용이 바로 집행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6b절에서는 “지체하지 아니하리라”하였고, 7b절에서는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천사는 하늘을 향하여 오른 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이 곧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며 말씀했습니다(6).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신 것은 최고의 맹세로서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맹세의 내용은 지금까지 하신 계시의 말씀이 더 이상 지체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의미는 `다시 회개할 시간이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마지막 일곱 나팔이 울려 퍼지면서 일곱 대접 재앙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강도는 더욱 극렬하며 처절해질 것입니다. 아무도 그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말하지만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는 은혜의 때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처럼 작은 두루마리 책에 들어있는 비밀의 말씀들을 모두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지 않고 심판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종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의 나팔을 부시고, 은혜와 심판의 복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종말의 때일 수록 작은 두루마리 성경 책의 가치를 알고,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말씀 중심으로 삶을 고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재앙만으로 회개하고 삶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재앙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곧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재앙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이 들려옵니다. 이를 통해 재앙의 의미를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인류와 우리에게도 무한정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돌이켜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고, 주님 앞에 설 때도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장면이 바뀌어서 지상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말씀이 집중됩니다. 요한에게 주신 말씀은 사실 지상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늘에서 나서 요한에게 들리던 음성이 또 다시 요한에게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는 음성이었습니다. 4절에서는 `기록하지도 말라`는 말씀이 `이제 가서 가지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9절에서는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는 요한에게 천사가 “갖다 먹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먹을 때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순종해서 사도 요한이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그처럼 쓸 수가 없었습니다(10).
여기서 `말씀을 가져다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것`과 소화된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서 실천하고 전하는 삶`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져다 먹을 때는 그처럼 달콤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꿀송이처럼 매우 달게 느껴집니다. 제가 처음 거듭났을 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마치 꿀단지를 옆에 끼고 하루 종일 먹는 것과 같은 달콤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시공부도 전폐하고 하루 종일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때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얼마되지 않아 신구약 성경을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줄거리를 요약하고 문단을 나누었습니다. 요사이 하는 귀납법적 성경공부, 스터디를 스스로 한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달콤함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의 달콤함과 능력을 맛보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먹은 후 배에서 완전히 소화되어 피와 살이 되게 하는 것, 곧 내 것이 되게 하는데는 쓰라림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자기 것으로 먹고 소화시키는 것에는 달콤함과 쓰라림이 함께 공존합니다. 말씀을 먹을 때는 달콤함이 있습니다. 입술에는 송이꿀처럼 그처럼 달게 느껴질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영접하고 소화해서 살아가는 데는 쓰라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말씀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맞지 않는 말씀을 영접하여 순종하기까지는 많은 투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곧 어떤 말씀이든 깊이있게 소화시켜 내 것으로 하는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소감을 한 편 깊이있게 쓰는 것입니다. 소감쓰는데 어려움 따르지요. 투쟁이 따릅니다. 그래서 잘 쓰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소감을 쓰는 것은 말씀을 소화시켜 영혼의 살이 되고 피가 되게 하는 작업입니다. 그렇게 소감으로 소화시킨 말씀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을 불신 세상 속에서 순종해서 살아가는 것과 전파하는 삶에는 더 많은 쓰라림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데 대한 댓가지불, 고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 호락하지 않습니다.
요사이 대학원에 다니는 목자들은 연구실 MT로 스키장이나 레조트를 많이 다녀왔습니다. 신입생 환영회 명목으로 간 것 같은데, 의례히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그곳의 이야기는 온통 출세와 정욕과 세상 영광 이야기입니다. 이런데서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고 믿음으로 버텨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또 교수님이 주는 술 잔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런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적 가치관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사실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데서 조금씩 용납하며 생각과 가치관이 세상적으로, 정욕적으로 옮겨가고 물들어 버릴 때, 더 이상 좁은 길, 제자의 길, 캠퍼스 목자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쓰라림이 따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회개와 심판의 말씀을 전하고자 할 때 더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쉽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산상수훈에서 마치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던져 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돼지들은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과 말씀의 종들을 사정없이 짓밟고 돌이켜 해를 가하게 됩니다.
“가져다 먹으라”는 말씀은 에스겔 2,3장을 배경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강팍한지 이마가 단단한 놋 성벽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한마디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강팍한 그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파숫군으로 보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듣든지 아니듣든지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말해줍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이런 가운데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려운 말씀일지라도 깊이 먹고 가서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을 전하는 자의 쓰라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에스겔에게 그들보다 더 강한 금강석과 같은 담대한 마음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른 뼈다귀와 해골과 같은 그들일지라도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이 다시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다시`라는 말은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2,3장에서 요한은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 온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이 증거해야 할 대상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들이었습니다. 곧 온 세상 만민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들도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자들만큼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 주신 사명은 오늘날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요,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한 힘센 천사에게 들려졌던 작은 두루마리 성경책을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들에게도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가 달게 먹고 가서 쓰게 고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들은 우선 말씀을 달게 먹는 자입니다. 달게 먹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데 소태처럼 쓰게 먹는 자들이 있습니다. 억지로 먹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자는 거듭남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거듭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달게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달게 먹고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만 먹고 영혼이 살쪄서 피둥거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는 쓴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쓴 맛은 곧 달콤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전도자나 양육자나 둘 다 모두에게 말씀을 새롭게 깊이 먹는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전하는데 어려움이 따르지만, 한편으로는 말씀을 다시 새롭게 먹는 시간이 되어서 배가의 힘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사명인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34절은 말합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사명인의 양식을 힘껏 감당하며 드셨을 때 언제나 스피릿 넘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인의 삶을 사는 것이 꼭 손해인 것은 아닙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2010학번 새내기들이 몰려옵니다. 이들에게 말씀을 달게 먹고 가서 전하는 삶을 온전히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 센 천사가 우레 소리를 발할 만큼 엄청난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고장난 영혼이라도, 어떤 황폐해진 영혼이라도 고침받고 치유받아 새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하늘의 말씀이 요한을 통해 우리들에게도 전해졌고, 이 손에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사명은 말씀을 달게 먹고 가서 쓰게 고하는 자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달게 먹고 가서 쓰게 고하는 것은 모두 달콤함으로 보상을 받게 하십니다. 어디 말씀을 받고 전하는데만 이런 진리가 적용되겠습니까? 세상 만사, 모든 이치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쓰디 쓴 고난이 없으면 달콤한 열매는 없는 것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이 많습니다. 해야 할 십자가가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학문의 십자가, 가정의 십자가, 직장의 십자가, 물질의 십자가가 배로 더 많아지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며 다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 달콤함이 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쓴 맛을 보지 못하면 달콤한 맛도 볼 수 없습니다.
원두커피에 부드럽고 달콤한 케익 조각을 함께 먹을 때 더욱 맛이 있습니다. 인생의 쓴 맛이라는 것은 더욱 깊은 인생의 달콤함을 맛보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생의 쓴 맛을 보면서 지나가고 있습니까? 곧 달콤함의 새 인생이 열려질 것입니다. 다만 인내함으로 쓴 맛을 잘 음미하며 지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달콤함 속에 있습니까? 쓴 맛을 내는 고난을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달콤함이 오래 지속됩니다. 쓰디 쓴 원두커피가 더욱 향긋하고 맛이 있는 때가 오듯이, 과거의 고난이 더욱 맛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향기가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새 봄학기 모두 고난을 힘써 감당함으로 달콤함을 맛보는 2010년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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