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율전 UBF 메시지, 계시록 11강

믿음의 종 2010. 1. 26. 12:18

2010년 겨울학기 요한계시록 제 11 강(1.24)

 

나팔을 부는 의미

 

말씀/요한계시록 8:1-13

요절/요한계시록 8:6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지난 주 아이티 강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15만 명을 헤아리는 사망자 수와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헤아릴 수 없는 분들이 다치고, 또 더 많은 숫자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뉴스에 자꾸 비치는 그들의 비참한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지진이 나기 전에도 아이들이 진흙쿠키를 먹고, 이제는 그것도 값이 뛰고 올라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간간이 생존자 구조 소식이 전해지지만, 그 땅의 비극은 너무 커서 어느 누구도 위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인간들은 보편적인 인류애에 가치를 두고, 힘을 합쳐 돕고자 아이티로 구호품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이런 일에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서 도와야 할 것이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도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아이티를 위한 구제헌금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작은 헌금이 아이티 난민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문제는 이런 지진은 지구촌 어느 곳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더욱 지진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일컫는 1976년에 일어난 중국 탕산 대지진은 진도 7.5의 강진에 25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도 매우 강력합니다. 2004년 인도네시아 해저 지진의 강도는 9.3의 아주 강력한 강진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쓰나미로 동남아에서 23만 명의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지진은 3초에서 5초 사이에 모든 것이 결판난다고 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나서 대피할 여유도 없이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진에 역기능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진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기도 하고, 엄청난 정치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1976년에 일어난 중국 탕산 대지진은 문화 대혁명으로 불리는 극좌 사회주의 운동의 종말을 고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사람들은 지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요사이 우리는 계시록 말씀을 통해 재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재앙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재앙이 아닙니다. 종말적인 재앙으로서 그 재앙의 강도가 점점 더 세지고, 광범위해지고 있습니다. 7인 재앙에서 7나팔 재앙으로, 7나팔 재앙에서 7대접 재앙으로 발전되어 갑니다. 그야말로 3중의 대 환난으로서 빠져나갈 틈이 없습니다. 이 중의 일부는 성취된 것도 있고, 일부는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 있으며, 일부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의 재앙으로 남겨진 것도 있습니다.

가히 인류의 역사가 재앙의 역사라고 불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더 큰 전무후무한 종말적인 재앙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재앙의 역사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재앙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일곱 인 재앙에서 나팔 재앙으로 이어지는 말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일곱 째 인을 떼자 일곱 나팔 재앙이 나타났다는 것은 나팔 재앙이 일곱 인 재앙에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7인은 인간 파괴에 초점이 있고, 7나팔은 환경 파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인간파괴와 환경파괴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곧 인간파괴는 환경파괴이며 환경파괴는 인간파괴와 일맥 상통한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일곱 째 인을 떼실 때였습니다. `일곱 째 인을 떼실 때`란 이제 두루마리 성경 안에 감추어졌던 모든 비밀의 말씀이 다 풀릴 때라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일곱 째 인은 가장 중요한 계시의 말씀이 풀릴 때임을 말해줍니다. 그 때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했습니다. 반 시간의 문자적 의미는 30분을 말합니다. 일곱 째 인을 떼기 전에 30분의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이 침묵의 30분은 무엇을 말합니까? 흔히 `폭풍 전의 고요`란 말이 있습니다. 강력한 허리케인이 몰아치기 전에, 아주 잠깐 동안 고요한 침묵이 찾아 옵니다. 이 침묵은 앞으로 있을 강력한 태풍의 전주곡입니다.

그러므로 이 침묵의 30분은 아주 중요한 다음 계시로 넘어가는 준비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침묵의 30분은 사도 요한이 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기간이기도 합니다. 요한 자신도 더 강한 재앙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소화하기 위해서 잠깐 동안의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그 후 요한이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었는데, 이들은 예외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일곱 나팔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2). 이들은 일곱 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나팔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먼저 구약적 배경을 살펴보면, 나팔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선포와 그 전쟁을 위한 군사들의 소집에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을 다룬 말씀인데, 여기서 나팔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팔을 길게 울려 부는 가운데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또 군사들의 이동에도 예외없이 나팔이 쓰였습니다. 승리의 때에도 나팔을 길게 울려 불었습니다. 왕의 즉위식에도 불었습니다. 국가의 중요행사와 즉위식에 모두 나팔이 쓰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종말적 심판을 경고하거나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팔을 부는 의미는 모두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나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에 담긴 나팔 소리의 의미를 잘 깨닫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나팔 재앙은 모두 일곱 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두 불신자들에게 임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8장에서 이마에 인을 맞은 성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후 하늘에 올라갔고, 땅에 남은 자들은 불신자들로서 이들에게 임할 무서운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서운 나팔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성도들의 기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이 천사는 앞선 일곱 천사장들과 다른 천사로서 성도들의 기도를 주관하는 천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놓여있고, 그 앞에 금 향로가 있었습니다. 금 향로는 향을 피우는 화로로서, 제사장들이 들어와서 기도를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향로의 숮불에 향을 집어 넣으면 향연이 솟아오르는데, 그와 함께 제사장은 안에서 기도하고 백성들은 밖에서 자기 죄를 회개하며 함께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4절에도 보면,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향연과 함께 기도가 드려지는 것은 그만큼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강력히 상달되는 가시적 효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거나 공중에 흩어짐이 없이 모두 다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실로 기도야말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향연이요, 최고의 제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로마 시대 성도들은 무슨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드렸을까요? 아마도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불의한 세계에 맞서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속히 임하도록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한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탄원하며, 하나님께서 속히 악인들을 심판해 주시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불의하고 고통스러운 로마 시대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힘있게 확장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하나도 외면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향로에서 피어 오른 향연이 흩어짐이 없이 모두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향연 자체가 성도들의 기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5:8). 하나님은 이 성도들의 기도를 참작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의 시기와 강도를 조절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십니다. 어디 기도뿐입니까? 손과 발을 다 필요로 하십니다. 입도 필요로 하십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시기를 저울질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들의 중보기도가 있었다면, 그 악한 소돔과 고모라도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인 한명도 없고, 그 의인들의 기도 소리가 그칠 때가 바로 멸망의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판의 와중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롯과 그의 가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지 않는 분들은 거듭나지 않았거나 불신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기도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기도가 하나도 공중에서 그냥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고, 모두 향연과 함께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말씀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공중에서 허무하게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하되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한 원대한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이기적인 기도, 취업과 돈벌이와 승진과 자녀를 위한 기도도 해야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를 해야 제사장다운 기도라 하지 않겠습니까? 양떼들의 죄를 위한 기도, 구원을 위한 기도, 더 나아가 캠퍼스와 인류구원역사를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짐이 없이 고스란히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실로 나의 기도가 인류의 멸망을 앞당기기도 하고, 늦추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류의 구원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아주 중요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힘을 내서 3년, 30명 새벽기도의 특공대가 되어서 힘써 중보기도를 감당한다면,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역사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일에 여러분이 힘을 보태셔야 합니다. 한 명이라도 새벽기도에 나와서 더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또 동역자들에게도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새롭게 영적 소원, 기도의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3년 동안 이루어야 할 한 두 개의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 본질적인 기도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는 은혜가 새롭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때가 되자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았습니다. 그러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때 쯤이면 성도들의 기도도 구원보다는 심판을 위한 기도가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이때 나타난 것이 나팔 재앙입니다. 일곱 나팔 재앙은 모두 하늘로 올라간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6). 그들은 나팔 불기를 준비했습니다. 준비했다는 것은 함부로 나팔을 불지 않고 매우 신중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팔 재앙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 계시록 8장에는 모두 네 개의 나팔 재앙이 기록되어 나옵니다.

 

첫째 나팔 재앙은 피 섞인 우박과 불 재앙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나팔 재앙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와 그 신하들과 애굽 전역에 내린 열가지 재앙에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가 열 재앙을 맞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맞서 싸우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훼방했기 때문입니다. 열 재앙에서 우박재앙은 7번째 재앙입니다. 나팔재앙이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그 우박에 피와 불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피`는 무죄한 사람들이 흘린 피입니다.

 

우박에 피가 섞여 있고, 또 그 우박에 불이 함께 내리니 얼마나 참혹하겠습니까?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땅과 수목과 각종 푸른 풀의 혜택을 너무나 많이 받아 누렸습니다. 땅에서는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공급받습니다. 수목의 활용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습니다. 산소 공급부터 건축의 재료와 종이 제작과 땔감에 이르기까지, 일회용 컵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목이 없으면 인간의 생존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풀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어 고기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땅과 수목과 풀이 타 버려서 생태계가 파괴되면, 양식 공급에 문제가 생깁니다. 더 이상 아웃백이나 빕스나 가족 레스토랑에 가서 고기를 썰고, 먹는 즐거움도 없어질 것입니다. 요사이는 점점 더 빠르게 사막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1/3이 사막이거나 사막화지역이라고 하지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접경지역을 사헬지역이라고 하는데, 그 면적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매년 60㎢의 면적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또 아마존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밀림의 수목과 초지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방치한다면 하나님의 재앙이 아니더라도 인간 스스로 멸망을 초래할 것입니다.

둘째 나팔재앙은 바다가 심판을 받는 재앙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여기서 `불 붙는 큰 산이 무엇이냐`에 의견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바다의 화산폭발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불덩이로서 전쟁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불 붙는 큰 산 때문에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어 죽게 됩니다.

애굽의 열 재앙 중의 첫 번째는 나일 강이 피로 붉게 물들여지는 재앙이었습니다. 그 나일 강은 오늘날 인도 힌두인들이 신으로 섬기는 갠지스 강처럼 신으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일 강을 피로 심판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고기도 죽고, 그 강은 악취가 나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바다가 심판을 받자 바다 가운데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었습니다. 고래도 죽고, 상어도 죽고, 참치, 고등어, 복어, 돔, 꽁치, 멸치, 갈치, 홍어, 가오리에 이름도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즐비하게 죽었습니다. 그러자 생선 값이 대폭 뛰어 올랐습니다. 제가 생선요리를 참으로 좋아하는데, 이제 물고기가 죽고 값이 폭등해서 더 이상 생선요리를 먹을 수 없게 됩니다. 고등어 조림이나 동태탕도 먹을 수 없습니다. 맛있는 회는 영영 먹을 수 없고, 해물탕은 금값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는 재미가 배 이상 확 줄어듭니다.

 

게다가 배들의 삼분의 일도 깨져 더 이상 바다를 활동무대로 하여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이 바다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비율이 얼마나 높습니까? 수산업과 해운업으로 먹고 살아가는 국가나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 문을 닫아야만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생존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사실 요사이 바다는 심각히 오염되어서 더 이상 물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다에 대한 재앙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나팔 재앙은 물 근원에 대한 심판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햇불 같이 타는 큰 별`은 문자적으로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석이 떨어진다고 물이 쓴물이 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상징적인 의미로 큰 별이란 지도자를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악한 지도자나 거짓 선생들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들은 쓴 쑥으로서 사람들에게 거짓 진리나 악한 생각으로 오염된 쓴 물을 먹이는 자들입니다.

 

본문의 `강들`이나 `물샘`이란 물 근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물 근원이 심판을 받아 쓴물로 변화되어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학복협이란 학생복음운동의 잡지로서 `물 근원`이란 정기 간행지가 있었습니다. 왜 물 근원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캠퍼스의 젊은 지성인들 자체가 오늘날 물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수지나 강들은 상수원으로서 물 근원입니다. 이것이 오염되면 이를 파이프로 연결해서 공급받는 각 가정들은 모조리 오염된 물, 그야말로 똥물을 먹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근원으로서 상수원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캠퍼스의 젊은 지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오늘날 이 시대의 물 근원들입니다. 이들이 복음으로 깨어나 신선한 생수같은 존재로 변화되어 각 분야로 흘러 보낸다면, 국가나 사회는 깨끗이 정화되고 되살아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염된 교수들이나 선배들의 쓴 쑥의 악영향을 받아서 똥물을 들이킨다면, 이런 자는 가정이나 사회로 나가서 똥물을 먹이는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복음운동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인 영혼이나 정신을 오염시키는 것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인생을 망치게 되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도 일생동안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캠퍼스에는 이런 자들로 운동권에 오염된 쓴 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도 죽게되고, 다른 사람들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쓴 쑥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자신도 쓴 물을 들이키고, 또 다른 사람도 쓴 물을 먹게 하는 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쓴 쑥이 되어서 쓴 물을 흘러 보냅니다. 이 물을 먹는 자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이 쓴 물을 들이키고 살아감으로 평강이나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사는 사회는 쓰게 되어 결코 살만한 세상이 못됩니다. 결국 저주받은 세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넷째 나팔 재앙은 일월성신 등 천체에 대한 심판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이것은 애굽의 열 재앙 중 아홉 번째인 흑암재앙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에 흑암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손을 더듬을만한 흑암재앙이 임하여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 단 몇 분이라도 있으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밝은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진정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12절에서 해와 달과 별들이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치명적인 공격을 받을 때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로써 6:12,13절에서 여섯째 인 재앙에서 받은 해와 달과 별들이 더욱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낮과 밤의 구분이 없어지고 어두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구 생태계나 환경은 크게 변하여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이나 기후 재앙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번 겨울에 지구촌은 유례없는 혹한과 폭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몆 주 전만 해도 우리도 혹한에 눈 폭탄을 맞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중국 내이멍구 자치주에는 영하 40도의 혹한에 1미터가 넘는 눈이 와서 사람과 동물이 1달 동안 갇히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유럽도 얼어 붙었습니다. 어떤 과학자는 지구촌에 미니 빙하기가 찾아오지 않았나? 하며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더 참혹한 추위가 찾아 올 것이고, 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호주에서는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많은 생명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지구의 기후 변화는 인간의 교만과 탐욕의 죄의 결과를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학대하자 자연도 더 이상 인간의 보호기능을 거두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나팔재앙은 그보다 훨씬 더 강도가 셀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상은 그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운 나팔 재앙 속에서도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서운 재앙 속에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팔 재앙 속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먼저는 1/3만 재앙을 내린 것입니다. 나팔 재앙은 전 지구적인 재앙이 아니라 부분적인 재앙입니다. 땅과 수목과 풀도, 바다도, 물 근원도, 천체도 1/3에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물론 부분적인 재앙이라 하더라도 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쳐 참혹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3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2/3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경고나 예고없이 갑자기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는 은총과 감사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팔 재앙은 신자가 아닌 불신자들에게 내리시는 재앙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진정으로 회개함 없이, 거듭남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혹 없습니까? 만약 회개함이나 거듭남 없이 살아간다면 이런 나팔 재앙의 참혹함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도 나팔 재앙 속의 이런 저런 작은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지혜로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재앙을 안다면 미리 준비해서 피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팔 재앙의 참혹함을 안다면, 이 재앙을 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이런 나팔 재앙 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참혹한 심판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단 한명도 없어야겠습니다. 이런 재앙을 알면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함이 없이 이런 재앙을 고스란히 받는다면 아마도 살아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구원받은 우리들은 자신의 구원에만 안주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나아가 이런 재앙을 알리고, 복음을 영접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음을 알리고, 구원받기까지 겸손히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가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노아 시대 홍수 속에서 망한 자들이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이 모두 성취되게 됩니다.

 

13절에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가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공중나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누구나 예외없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독수리는 `화, 화, 화`가 있으리라고 3번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나팔 재앙도 큰데, 앞으로 더 큰 재앙 세가지가 남았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런 재앙을 받게 됩니까?

그것은 `땅에 사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땅에 사는 자들`이란 재앙을 내려도 회개치 않는 전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경고의 말씀 속에서도 반응이 없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소망이 없게 됩니다. 재앙을 받고 회개하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나팔 소리만 듣고도 두렵고 떨림으로 회개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이상 죄악에 종노릇하는 자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고귀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새 생명을 받은 우리들은 더욱 고귀합니다. 새 생명을 얻고 누리는 자들은 말씀을 잘 듣는 자들입니다. 모두 말씀에 들을 귀를 가짐으로 혹독한 재앙과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고, 축복된 새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먼저 구원받은 자로서 항상 기도하며, 힘써 복음을 전하고, 제자양성하는 자들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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