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계시록 제 12 강(1.31)
회개를 거부한 사람들
말씀/요한계시록 9:1-21
요절/요한계시록 9:20,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은혜로운 전국 학생 연합 수양회를 마친 후 나팔 재앙에 관한 말씀을 전하자니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재앙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있음을 알 때, 더욱 큰 은혜 속에 감사하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다섯째, 여섯째 나팔 재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인 재앙이 사람 재앙인데 비해, 나팔 재앙은 환경 재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땅과 바다와 물 근원과 천체의 1/3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섯째와 여섯째에는 강력한 사단의 활동과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통한 재앙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회개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켜 놀라운 새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다섯째 나팔 재앙-연기와 황충 재앙(9:1-11)
9:1절을 보십시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저갱의 열쇠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로 의인화된 것을 볼 때, 이 별은 단순한 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별은 곧 사단을 가리키는 별로서, 천사장 중 하나가 타락한 별을 말합니다. 신구약과 외경의 공통된 사상은 천사장 중 하나가 타락하여 사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눅10:18, 단8:10).
이사야 14장에는 교만한 바벨론 왕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사단의 유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던져짐을 당하리로다”(사14:12-15).
사단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은 천사장 중 하나였으나 너무 축복을 받자 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적하고자 하다가 땅에 쫓겨난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사단의 가장 근본 속성이 교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단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교만이 사단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불쑥 불쑥 교만의 죄성이 찾아옵니다. 이때는 사단이 역사하는 순간으로서 매우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실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대적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봐 주십니다.
무저갱이란 `끊없는 구덩이, 바닥없는 깊은 구덩이`란 뜻으로서 악한 영들의 감옥, 사단의 감옥을 말합니다. 탄광촌이나 동굴에 가면 이런 끝이 없는 구덩이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구덩이에 돌을 던지지만, 돌이 바닥에 부닥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저갱이란 그런 지하 구덩이로서 물리적인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악한 영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하게 제압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사단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이 열쇠는 무저갱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사단이 무저갱에서 살 수 있다는 것과 거기서 일정 기간 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무저갱이란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무저갱에 살면서 일정 기간 동안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저갱의 열쇠를 사단에게 주셨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무저갱의 열쇠를 받은 사단의 활동이 어떠합니까?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연기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바로 여섯째 나팔 재앙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연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나 그 결과로 일어나는 연기를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해와 공기가 어둡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일시적인 어둠의 권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날 도심을 걷다보면 자동차 매연과 매케한 공기로 인한 스모그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모그는 도시를 어둡게 하고,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이 연기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게 하고, 질식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연기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영혼을 덮어버리는 검은 연기입니다. 이런 연기는 영혼을 어둡게 하고, 영혼의 자정능력을 상실케 합니다. 그 결과 선악의 분별력이나 절제력이 사라지고, 쉽게 죄를 저지르게 합니다.
오늘날은 이런 사단의 검은 연기가 더욱 기승을 부려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있습니다. 사단의 검은 연기는 방송계를 장악하고, TV와 인터넷을 장악해서 영혼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 검은 연기를 내뿜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어른들이고, 연예인들입니다.
한국청소년연구원 오혜영 박사는 “아이들은 마약, 섹스, 폭행 사건에 연루된 연예인이 금방 방송에 복귀하는 것을 보고 법을 어겨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은 비행의 경계가 흐려지고,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모델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청소년의 범죄도 생계형이나 일탈형에서 유희형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재미삼아 충동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U 튜브에 올라오는 동영상을 보면, 혀를 차며 깜짝 놀랄 일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왜 이리 되었습니까? 모든데서 경계가 모호해지고, 진리가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아예 진리가 없다는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아닙니까? 이 사단의 까만 연기가 영혼을 망치는 것입니다.
특히 그런데 일조한 것이 TV와 인터넷입니다. 모든데서 경계가 허물어진 내용을 가감없이 방영하니 아이들의 도덕적 판단력이 흐려진 것입니다. 연약한데다 절제력, 죄의식이 약해지면서 놀이 삼아 탈선하고 비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대 응용심리학과 김미라 교수는 “심리학적으로 절제란 재미 있어도 그만둘 줄 아는 힘, 귀찮고 힘들어도 지속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절제력이나 판단력이 사단의 검은 연기를 마시고 다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검은 연기를 마시고, 선악의 분별력을 상실한 채 더욱 어두움의 자식들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기로 가린다 해도 해와 공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이 계십니다.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가 존재합니다. 우리부터 이런 사단의 상대적인 연기, 검은 연기에 노출되어 힘없는 삶을 살아가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런 연기를 마시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검은 연기 속에서도 분별력을 잃지 않는 자입니다. 죄악된 문화의 탈을 쓴 연기 속에서도 분별력을 잃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둘째는, 황충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황충은 locusts로서 메뚜기 과의 곤충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메뚜기는 하나님의 파괴와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애굽에 행해졌던 10재앙 중 여덟 번 째 재앙이 메뚜기 재앙이었습니다. 이 메뚜기가 올라와 모든 식물을 먹어 치웠습니다. 그런데 다섯째 나팔 재앙으로서 황충은 더 강력한 메뚜기였습니다. 이 황충은 식물을 먹어치우는 메뚜기가 아니라 전갈처럼 쏘는 황충이었습니다. 전갈이 쏘는 고통은 제일 큰 고통으로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런 황충이 전갈의 권세로 괴롭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4b절에 보면, 그들은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 곧 사단의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불신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고, 다섯달 동안 괴롭게만 합니다. 여기서 `다섯달`은 문자적 의미보다 사단의 지배아래 행해지는 일정한 고통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피하여 갑니다(6).
7장에서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 144,000명을 배울 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와 사단의 인침을 받은 자입니다. 인침이란 소속과 소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인침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 소속된 자로서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단께 인침을 받은 자는 사단에 소속된 자로서 사단의 소유입니다. 이렇게 소속과 소유가 달라지면, 그 주인께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영생으로 보응하시고, 사단은 배신을 때립니다. 황충이 쏘는 자는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죽기를 구하여도 죽을 수 없는 만큼의 지독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일생동안 사단에게 속하여 사단이 시키는데로 절대 충성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결과는 황충에 쏘이는 죽는 듯한 고통뿐입니다.
사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사단에게 인침을 받아 사단에게 속했는지도 모르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않은 자들은 모두 예외없이 사단의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사단이 조종하는데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황충에 쏘인 자는 감정의 메마름을 겪고, 분노와 억압된 감정 속에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주경학자들은 역사적으로 황충을 로마 황제로 비유하기도 하고, 회교인 사라센 제국의 침략으로 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집단은 아주 큰 황충집단입니다. 운동권이나 범죄단체도 심각한 황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황충에 쏘이면 거의 죽거나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아직 진정한 황충 재앙은 오지 않았다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황충 재앙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충성한 자에게 배신을 때린다는 것입니다. 1세기 때 로마 황제는 신으로 군림해서 모든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주는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도미티안 황제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황제를 신처럼 섬겼지만, 그 황제는 배신을 때렸습니다. 로마 황제는 가혹하리만큼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사람이나 세상이 주는 결과도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교수님이나 이성 친구나 조직의 보스가 장래를 보장하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나 이성 친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정신없이 충성합니다. 밤낮이 없습니다. 모든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밤잠도 자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배신입니다. 그때 마음은 한없이 괴롭고 메마릅니다. 분노의 감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것이 황충 재앙입니다.
지난 주 언론에는 삼성전자 부사장의 자살 소식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KAIST 전자공학 석사, 미국 스탠퍼드 전자공학 박사를 거쳐 1992년에 삼성전자에 입사했습니다. 그동안 반도체 메모리 개발 및 공정 분야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2006년에는 그룹 내 최고의 엔지니어에게 주는 삼성 펠로에도 선정됐습니다. 더구나 그의 연봉은 10억에, 보유한 주식만도 75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남이 갖지 못한 `부`와 엔지니어로서 `명예`를 모두 가진 그가 왜 자살을 택했습니까?
그 사정을 모두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A4용지에 쓴 유서 내용을 보면 부서 이동에 따른 스트레스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시스템 비 메모리 분야인 개발실장에 임명된 것입니다. 일종의 좌천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평생 실패를 모르고 엘리트 코스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온 그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는 것입니다. 회사가 배신을 때린 거죠. 그게 회사의 속성이요, 세상의 속성입니다.
요사이 55-63년생이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인데, 올 해부터 퇴직 연령에 해당되어 퇴출의 압박이 심하다고 합니다. 이들 800만 명은 한국 산업화의 숙련된 일군이요, 조국의 근대화에 몸을 바친 자들입니다. 회사도 이들 때문에 일어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평생 몸과 열정을 바쳐 헌신한 회사로부터 나가라는 통보를 받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구조 내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이나 사람들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배신을 때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연구실에 영혼을 망치면서까지 충성할 필요 없어요. 남자도 결혼 전에는 간을 다 빼주고, 행복을 다 찾아다 줄 것처럼 약속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엄청난 배신을 때립니다. 이런 것이 모두 황충 재앙을 받은 인간의 죄악된 속성이요, 사단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나 신뢰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한 번 행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그 인치신 자들을 책임지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약속이 안 지켜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이런 자들은 미래 황충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복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7-10절은 황충의 모습이 나옵니다. 황충들의 모양이 어떠합니까? 전체적인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습니다. 이는 강한 공격력을 소유한데다 매우 빠르고 힘이 좋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머리에는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습니다. 이는 사단의 군사로서 승리의 기세를 말합니다. 이 기세로 사단은 인간 위에 왕노릇 합니다.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습니다. 이는 사단에게도 악마적인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여자의 머리털과 같은 머리털이 있습니다. 여자의 머리털이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답습니까? 특히 생머리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것을 보면, 안 넘어가는 남자들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황충이 겉으로는 매우 아름답고 매끄러운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사단은 항상 광명한 천사로, 뱀처럼 위장해서 접근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매끄럽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독이 가득합니다.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습니다. 이는 한번 물면 놓치 않는 강한 공격력과 집착력을 말합니다.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습니다. 이는 쇠로 된 방패막이로 가슴을 덮는 것을 말합니다. 사단의 강한 방어력을 말합니다. 사단도 자신을 지킬 줄 압니다.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와 같습니다. 이는 빠르고 강한 공격력을 가지고 세상에 큰 영향력을 준다는 것입니다.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습니다. 이는 사단의 독을 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아바돈`이나 `아볼루온`이나 그 이름의 뜻은 동일하게 `멸망자, 파괴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destroyer입니다. 사단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배신을 때림으로 철저히 파괴합니다. 개인의 영혼도 파괴하고, 가정도 파괴하고, 공동체의 역사도 파괴하고, 창조세계도 모두 파괴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단의 속성을 잘 알고, 결코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Ⅱ. 여섯째 나팔 재앙-유브라데 강가의 전쟁재앙(12-21)
첫째 화는 지나갔지만 아직 화 둘이 남았습니다. 첫째 화는 이제까지 이루어진 나팔 재앙 중 첫 번째부터 다섯 번 째까지를 말합니다. 이제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나팔 재앙은 다섯 개를 하나로 묶은 것 이상으로 더욱 혹독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났습니다. 하나님 앞 금 제단은 금 향단을 말합니다. 이 금 향단에는 성도들의 기도가 향연으로 쌓여 있는 곳입니다. 이는 여섯째 나팔 재앙이 성도들의 기도와 순교자의 호소에 대한 응답임을 말해줍니다(8:3-5, 6:9-10).
한 음성은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네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말합니다. 그러자 네 천사가 놓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연월일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었습니다.
네 천사는 자신뿐이 아닌 마병대의 엄청난 수를 동원하여 이 일을 행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마병대의 수가 얼마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마병대의 수는 자그마치 이만만이었습니다. 이만만이란 2×10,000×10,000으로서 2억명을 말합니다. 이는 엄청난 숫자의 군대조직입니다. 역사상 이만한 군대가 동원되어 싸운 적이 없었습니다. 가장 많이 동원된 군사들의 숫자가 2차 대전으로 7천만 명이었습니다.
이는 실제 숫자가 2억이라기 보다 사람에게 심판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엄청나게 많음을 말해줍니다. 그야말로 종말적 심판은 거대한 숫자의 군사가 동원되고, 막대한 인명이 희생될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었습니다.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왔습니다. 유황불, 지옥불은 여기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사자머리는 용맹스러움과 무자비한 공격력을 나타냅니다. 불과 연기와 유황은 마치 오늘날 대량 살상무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전쟁을 치르는 모습을 연상케 됩니다. 그러나 1세기 당시 오늘날 현대전의 무기까지 미리 내다보며 정확히 예언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이 세 재앙 곧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불신자들을 말합니다. 아직 2/3은 땅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그 모든 무서운 인 재앙과 나팔 재앙을 보고 겪은 자들입니다. 이런 그들은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그들은 어리석게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손`은 전인격 존재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 전체를 말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여러 귀신을 섬기고, 걷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또 살인과 복술(요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치 않았습니다.
왜 이들이 그 엄청난 재앙을 보고서도 회개치 않았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그 엄청난 재앙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평생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재앙 속에서 건짐을 입는 은혜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았습니다.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복음을 듣지 못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재앙만 보았지, 그 재앙이 오게 된 원인이나 이유 등을 알지 못한 경우입니다. 이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며, 죄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경고 방송을 전혀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찾다가 홀연히 망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과 음식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재앙을 통해서도 다 죽지 않고 생명을 보존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지진의 재난을 맞은 아이티에도, 인도네시아에도 구호품과 함께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들의 영혼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을 재앙을 맞은 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로, 원래 그들은 그런 놈이라는 견해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엄청난 일을 겪어도 결국 회개치 않고 멸망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바로처럼 완악해져서 결국 갈데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앙 속에서도 도무지 돌이킬 줄 모르는 완악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재앙을 맞으면 겸손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재앙 속에서 더 마음이 강퍅해지고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메시지나 사역 앞에서 더욱 더 마음을 완악하게 했습니다. 이런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자꾸 완악하고 삐딱하고 딱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더 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요, 더 가까이 더 심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완악한 자들이 아니라 긍휼을 구하는 자들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불타는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전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죄가 정죄당하고 심판당하는 것으로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단의 연기와 황충 재앙으로 가득한 세상에는 더욱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이런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이들을 안고 씨름해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오래참고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 가운데 심판받고 완악해져서 죽어갈 자는 한 명도 없어야 합니다. 원래 그런 놈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다 상처가 많고, 복음에 대한 오해가 많기에, 또 불신 속에서, 자기 생각 속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고귀한 존재들이기에, 있는 모습 그대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대신 내어 주시기까지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속에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재앙 속에서 돌이키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재앙 속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는 더욱 어리석은 자입니다. 재앙 속에서는 더 잘 돌이킬 것 같은데, 더 완악해져서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질 때, 평화의 때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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