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출애굽기 제 20 강(9.6)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말씀/출애굽기 34:1-35
요절/출애굽기 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성경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죄악된 인간과 대조하여 하나님은 너무나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성경은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참 많이 쓰여 있습니다. 원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의 죄부터, 동생 아벨을 쳐죽인 가인의 살인죄, 강력범 라멕의 죄, 노아시대 사람들의 막가파식의 죄, 술에 취하고 딸들과 관계를 한 노아의 죄, 아내 사라를 누이라한 아브라함의 연속적인 죄, 야곱의 화려한 여성 편력의 죄,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간의 간음의 죄,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의 죄, 다윗의 간음과 살인의 죄, 역대 왕들의 지독한 우상숭배의 죄 등등 엄청난 죄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밥 먹고 죄짓는 것밖에 없어 보입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는 치명적인 범죄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치명적 죄악을 저지른 인간에 대한 끝없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는 끝이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구속역사는 단절될 듯 하면서도, 단절되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언약 파기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은 구약에서 언약 체결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보여줍니다. 이 언약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앞으로 이 언약을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단절됨이 없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모세가 깨트린 첫 번째 돌판이 언약의 단절을 상징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새 돌판은 언약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언약의 회복은 인간의 회개가 아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회개하고 간구해도, 언약의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본래적인 성품을 잘 알고, 또 죄악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다시 충만히 덧입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분명히 끊고, 원하시는 것은 분명히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 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Ⅰ. 나는 여호와라 여호와라(1-9)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소서`라는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확신하도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영광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첫 번 것과 똑같은 두 번째 돌판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처음 것과 똑같은 돌판 둘을 만들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돌판에 처음 판에 기록했던 말씀을 똑같이 적어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아무도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오르지 말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3). 이는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경외심을 갖고,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는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부지런하면서 열정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모세의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셨습니다(5). 그리고 모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이름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스라엘이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이스라엘과의 재계약 체결도 근본 하나님의 본래적인 성품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리셨습니까?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여호와라 여호와라”며 두 번 반복하신 것은 강조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로서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란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모세를 첫 번 부르실 때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3:14,15). 여호와란 “스스로 계신 자”란 뜻으로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쓰시고, 그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동일하신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체적인 속성이 어떠합니까?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제일 먼저 자비가 나옵니다. 이 자비라는 히브리어 `라훔`은 어원적으로 모태, 자궁을 의미하는 `레헴`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머니가 자궁 속에서 진통을 겪으며 낳은 자식들을 대할 때의 지극한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보다 어머니와 같은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직접 회임하고 산통 가운데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더욱 각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한다`는 것은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심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귀한 성품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으심도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십니다. 인자란 `헤세드`로서 상대방에 대해 끝까지 지킬 도리를 다하는 빈틈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은 우리 인생이 끝날 때까지 다함이 없습니다. 평생 헤세드의 인자하신 사랑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의 은총은 평생 지속이 됩니다. `진실`은 영어 성경에는 faithfulness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인생들을 향한 사랑은 끝이 없고,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풍성하십니다.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이 조금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사랑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모자람이 없습니다. 언제나 흘러 넘칩니다.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많다`는 것은 abounding으로서 아주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되 이 모든데서 풍성하시고, 무엇보다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죄악된 인간은 스스로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인류의 종말은 천재지변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내재된 심각한 죄성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악된 인간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오늘도 안타까워 하시면서 나같은 죄인에게 한없는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 송아지 우상숭배를 겪으면서, 한 순간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본래적인 성품으로 위기를 넘기며,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어머니와 같은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성애적인 사랑으로도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는 것은 부성애적인 사랑입니다. 이는 엄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버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그냥 눈 감아 줄 수 없습니다. 죄는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는 죄는 사함받지만, 죄의 형벌은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벌을 받게 할까요? 죄를 용서해 주신다면, 벌까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되, 벌을 면제하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은 유지되겠지만, 그 벌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죄의 심각성을 알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 그런 형벌로서 어느 정도 죄의 책임을 물음으로 죄 의식을 해결하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징계나 훈련 정도일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부성애적인 아픈 사랑입니다. 그 예로 다윗은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하고, 우리야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살인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죄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죄를 책망했습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죄를 죄로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침상이 흥건히 젖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받으셔서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게 될 형벌까지 면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정욕의 열매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후에 집안에서 근친상간의 정욕의 죄가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칼이 집안을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있음을 알고, 죄 짓기를 두려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사해 주시되, 형벌은 받게 하는 사랑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정욕죄, 심각한 정욕죄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이를 생각한다면 함부로 심한 정욕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비해 인간의 죄악은 어떠합니까? 인간의 죄는 모세의 중보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말씀하시자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기도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모세의 기도는 한결같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악을 사해주시고, 제발 우리와 함께 동행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을 주의 기업(주의 소유, 주의 자녀)으로 삼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에서, `이는`이란 because가 아니라 although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비록 목이 뻣뻣할지라도, 죄악되다 할지라도`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달라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살아나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음을 잘 알았습니다. 사람이 본성이나 기질이 잘 변하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사람은 여전히 뻣뻣합니다. 교만한 사람,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면이 꼬인 사람, 언제나 꼬여있습니다. 정욕적인 사람, 정욕이 잠복되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 언제나 게으릅니다. 인색한 사람, 언제나 인색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구원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 때문에`가 아니라 `비록 ~일지라도`입니다. 비록 죄악된다 할지라도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때문에`로 구원받는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이 인간의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비록 인간은 죄악되고, 여전히 교만하고, 게으르고, 물질적이고, 정욕적일지라도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재계약은 전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어머니같은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저희들이 한없이 교만하고, 죄악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연약할지라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 때문에`가 아닙니다. 내가 잘 난 것, 잘 한 것이 없습니다. 이를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머니같은 사랑, 헤세드의 사랑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Ⅱ.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피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10-28)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 번 언약을 체결할 때와 동일합니다. 크게 보면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족속들과는 언약을 체결하지도 말 것이며, 초청에 응하지도 말 것이며, 제물을 먹고 행음하지도 말며, 그들의 자녀와 결혼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앞서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적을 베풀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10).
지금 하나님께서 가장 우려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입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의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하나님께 심각한 타격을 입힌 자들입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또 다시 우상을 숭배할 가능성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목이 뻣뻣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금 사랑 가운데 기회를 주고자 하십니다. 그러면서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살 길은 가나안 족속들과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타협의 여지를 두면, 그것이 올무가 됩니다(12). 그것이 올무가 되어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이스라엘이 투쟁하기를 원하십니까? 13절에 보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트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말합니다. 우상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헐고, 깨트리고, 찍어야 합니다. 또 그들의 딸들과 혼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너 아니면 죽을꺼야` 말해도, 그런 자매들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결혼의 타락이 신자의 타락임을 말해줍니다. 이방인과 잘 못 결혼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자기 아내나 남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목자의 말보다 더 잘 듣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미스 가나안 출신의 와이프가 이끄는대로 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고, 우상숭배를 할 것입니다. 이는 누구나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좋은 것은 함께 살되,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영향을 끼쳐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학생 때는 훈련을 어느 정도 받아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사가 되어 첫 번 출근하자마자 세상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버려 술을 넙죽 넙죽 마시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점점 세상 사람과 동화되어 가치관이 변하고, 상대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생각이 들어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거야`는 한계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아직 연약하니까,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까, 아예 가나안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연약함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면 죄악된 장소나 사람들을 피해야 합니다. 별로 믿음도 좋지 않은 사람이 소주방이나 비디오방에 가고, 분내나는 밀실에 가면 뻔한 것입니다. 그런 장소에 가서 기도하면서 `난 괜찮을 거야, 난 이길 수 있어` 하다가는 시험받아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범죄의 단초가 되는 사람이나 환경과는 처음부터 단호한 자세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적극적으로 지켜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 년에 3번씩 드리는 절기와 안식일 제도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위해서 주신 제도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도 잘 은혜를 까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니까 절기와 안식일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보호와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3대 절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무교절과 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에 이어 7일 동안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빵을 먹는 절기입니다. 3월 중순경에 있습니다. 이는 애굽에서의 고난과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맥추절이라고도 하는데, 첫 번 밀이삭을 추수한 후 감사하여 드리는 절기입니다. 5월 중순경입니다.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수장절은 모든 추수를 마친 후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 이 모든 영적 육적 풍성한 은혜와 수확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돈독히 맺도록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은 안식일 제도입니다.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 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여기 밭갈 때와 거둘 때는 농경사회에서 가장 바쁜 파종기와 수확기를 말합니다. 이때 쉬게 되면 수확에 많은 지장을 초래합니다. 농사라는 것도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안식일이 다가오면 하나님을 믿고 쉬라는 것입니다.
이는 농사나 세상 일에 대해서도 근본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당장 급한 때에 세상 일을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입니다. 교수님이 주일까지 보고서나 논문을 써내라고 하면, 예배를 거르고서라도 써내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학생들은 주일 날 예배를 드리지 않고, 그 시간에 공부하면 그래도 좀 더 나은 성적을 받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장 한 두개 영어 단어를 암송하고, 수학 공식을 외우고, 학점공부를 하면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틀어 버리시면, 예를 들어 건강이 상하거나 사고라도 나면, 그동안 쌓아온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됩니다. 시편 127:1,2절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모든 것은 근본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분명히 지켜 나갈 때, 어떤 축복이 임하게 됩니까?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맺어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 일을 해주십니다. 이방 나라들이 쫓겨갑니다. 뭐 칼에 피 묻히고, 화살을 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히 이방나라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힘을 잃고 사라집니다. 또 지경이 넓어집니다. 나라의 경계가 확장됩니다. 개인의 삶의 영역도 넓어집니다. 회사의 지경도 넓어집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막아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아무도 그 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힘쓰면,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삶을 크게 축복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일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할 바꾸기입니다. 역할을 바꾸는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다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관계성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때 모든데서 더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런 믿음을 가지고 투쟁할 때,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이 영육간에 넘치게 임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번에 새로이 토요일 제자훈련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와서 훈련받는 자들은, 이런 면에서 진정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주말에 타락하고 낭비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청년의 때에 목숨을 걸고 경건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영육간에 넘치게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Ⅲ. 모세의 겸손(29-35)
이 마지막 부분에는 특이한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두 돌판에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증거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였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과 말하였음으로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거나 오래 기도를 하고, 영적 생활을 좀 하면,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영광이 얼마나 충만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을 보고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영광을 가린 것입니다. 그는 광채 나는 얼굴 빛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쉽게 접근토록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영광을 모두 육체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사도 요한은 육체 속에 감추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요1:14절에서 말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죄인들이 가까이 하실 수 있도록 겉으로 드러나는 신성을 모두 지우셨습니다. 육체에 가두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구원받아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이비 교주 비슷한 목사는 자신이 말할 때에 강단 뒤편에서 광채가 난다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무지개가 떴다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신령한 이슬이 내렸다고도 말합니다. 잘 믿지 않으니까 사진을 찍고 합성해서 보여줍니다. 요사이 문제되는 어떤 목사도 자신만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귀히 쓸 사자라고 말합니다. 약간 정신 이상이 된 자들입니다. 정상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목사 개인을 신비롭게 말하고, 과장해서 말하고, 자꾸 신격화하는 것은 타락한 바보나 어리석은 교주들이 하는 짓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거두시면 아무 것도 아닌 막대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광낼 수 없습니다. 모세처럼 스스로 얼굴을 가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도 이 나라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겸손한 자들이 교만한 자들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스스로 가리는 겸손한 자들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고, 계속해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허물많고 죄많은 저희와 동행하시고 함께 하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죄를 피하고,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영적 생활을 잘 감당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도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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