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09출애굽기 21 강

믿음의 종 2009. 9. 14. 21:14

2009년 출애굽기 제 21 강(9.13)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말씀/출애굽기 35-40장

요절/출애굽기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봄 학기부터 시작된 출애굽기 말씀이 오늘로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들로 빚어가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황금 송아지 숭배 사건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가까스로 수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중보기도 가운데 두 번째 언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고, 기쁜 마음으로 성막에 쓸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35-39장은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원함으로 성막에 쓸 예물을 실제로 가져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나옵니다(35:21,29). 그들은 아침마다 자원하여 예물을 연이어 가져왔습니다(36:3). 그들이 너무나 많이 가져오므로, 모세가 말릴 정도가 되었습니다(36:5).

하나님은 이 모든 예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지혜롭고 총명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 중심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35:30-36:1).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 곧 성령이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35:31). 이들은 여러 가지 성막 기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모양대로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성막은 조립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립에도 때가 있고, 순서가 있었고, 각각 조립의 방법이 달랐습니다. 이 모든 방식대로 마칠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출애굽기 40장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임재와 여호와의 영광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맛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Ⅰ.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40:1-33)

 

1-33절은 완성된 성막기구를 조립하고 배치하는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원칙이 자주 언급되어 나오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되니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성막 기구를 만들 때도, 조립할 때도, 배치할 때도 모두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40장에는 이 말씀이 7번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명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성막의 재료를 준비하고 만드는 과정에는 안식일 규례도 나오고, 창세기 1:2절의 `하나님의 영`도 나옵니다. 이는 성막은 제2의 천지창조와 같은 놀라운 사건임을 말해줍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첫째, 성막을 세운 시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때나, 사람들 컨디선 좋은 때나, 기분이 좋은 때에 성막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성막을 세우라고 하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새 해 정월 초하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둘째 해 곧 햇수로는 꼭 1년 후 첫째 달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깃점으로 달력이 바뀌었습니다. 출애굽기 12:2절에 보면,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달`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달로서, 유월절 절기가 들어있는 달입니다. 태양력으로는 3월 중순인데, 이스라엘 달력으로는 아빕월입니다(13:4). 후에 니산월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달이 새 해 첫 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세운 날과 출애굽한 날을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출애굽한 날짜에 성막을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우연의 일치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역사가 출애굽과 성전을 중심으로 새로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함으로 진정한 새 역사가 시작되었고, 또 성전을 중심으로 계속 새로운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성전 중심, 회당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 주위에 포진되어 살아갑니다. 마치 우리가 교회중심으로, 센타 중심으로 주위에 포진되어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당시도 그렇습니다. 또 오늘날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곳이면 꼭 회당이 있고, 그 회당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과 회당이 삶의 구심점인 것입니다. 모든 삶의 새로운 시작과 힘의 원천이 성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날짜를 맞추게 한 것은 출애굽이나 성막을 지은 목적이 하나님을 보다 잘 섬기기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냥 평범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죄를 마음껏 짓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유인이되,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 지을 자유가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출애굽 이전보다 더욱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출애굽 자체가 헛되고 무의미하게 됩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성막으로 출애굽이 끝납니까? 먼저 그 성막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막에서 보다 분명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또 선명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둘째, 성막 기구를 조립하고 배치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3-11절은 성막 기구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가? 그 대략의 위치를 말합니다. 17-33절은 실제 성막기구를 가져와 조립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성막 기구 하나 하나, 조립하는 것 하나 하나에 아주 세세히 `이것은 이렇게 놓고, 저것은 이렇게 조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위치와 조립의 순서를 분명히, 아주 세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자세히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막을 세우는 것에는 절대 인간의 생각이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마음대로 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주 철두철미하게, 작은 것 하나에도 말씀에 세세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만 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 모든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신앙의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두철미하게 순종하는 하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어떤 분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야만 순종합니다. 이런 분은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의 마음에 들 때만 순종합니다. 이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처음만이 아닙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조립과 배치의 과정에서도 철처히 순종해야 합니다. 이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자기 생각대로 했다가는,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영광의 성막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이고, 인본적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순종치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철저히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날마다 체험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셋째, 성막기구는 관유를 바르게 하고, 아론과 아들들은 물로 씻기게 한 것입니다(9-12). 관유를 바르는 것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별의 의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리라는 것입니다.

또 관유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이제 성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막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정성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막이 중요한 것은, 이 곳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막에 와서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기도응답이 활발히 일어날 것입니다. 또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거듭남과 성장의 은혜가 있게 됩니다. 병든 자는 고침을 받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한 죄 사함의 역사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도 활발히 일어납니다. 이는 모두 성막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또 대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물로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으로, 회개를 상징합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죄와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그 후 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 후 비로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13).

저를 비롯해서 주일예배를 섬기는 종들에게 이러한 물로 씻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아가 주일예배에 임하는 우리 모두의 자세가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세상에 살면서 죄로 오염되고, 많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를 씻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씻고 회개한 후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 후 하나님을 사모해 보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Ⅱ. 성막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33b-38)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철저히 순종하며 성막의 모든 역사를 마친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수고하고 애쓰며 기다리던 성막이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4,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이 두 요절에는 두 번씩이나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첫 번 강림하실 때에도,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함께 강림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실 때에도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같은 구름이 회막에 덮였습니다. 그와 함께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영광이니까, 시내산처럼 우레와 번개와 불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을 것입니다. 그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충만하매 모세가 감히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로, 자원함으로 또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역사를 마치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다고 할 때, 이 `성막`이 어떤 성막입니까?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막`을 어떻게 지어왔습니까? 기쁨으로 자원했습니다. 자원함으로 아침마다 예물을 연하여 가져왔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죄 사함의 은혜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아 많은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철두철미하게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역사를 마쳤다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으로 자원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온전히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쁨으로 자원하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성막을 세울 때, 거기에 놀라운 여호와의 임재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하나님을 자원하여, 기쁨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감동되어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이 진정 해야 할 일입니다.

어제부터 토요 제자모임을 새롭게 이루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제자양성역사를 새롭게 섬기고자 애쓰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시니어 목자인 조요셉 목자님과 김이삭 목자님이 앞서서 자원함으로 열심히 섬기는 것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자원함으로 소감도 쓰고, 자원함으로 은사계발과 섬김훈련도 받고, 자원함으로 피싱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자원함 속에 창조적인 지혜와 능력이 나오게 됩니다. 또 자원함 속에 두 배의 기쁨과 감동이 있습니다. 열매도 자원함의 산물입니다. 자원함으로 터닝될 때 그 순간부터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억지로 할 때는 열매가 맺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자원하는 신앙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타율적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것은 피곤할 뿐입니다. 아무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왕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가운데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풍성히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한 장소가 바로 성막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아무 곳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막에 나타났습니다. 도대체 성막이 뭐길래,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나타난 것입니까? 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히 나타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시내산의 영광이 성막으로 이동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시내산에서 성막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는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내주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스라엘은 얼마 전 금송아지를 숭배한 목이 곧은 백성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우상을 섬길 위험을 안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허물 많고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비록 그 장소가 성막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하신 것은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시내산에 임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으로서 경계와 한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비록 일정한 절차가 따르지만,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으며, 또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임하셨다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 성막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집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만큼 사랑하시며, 그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며, 축복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히 임하신 것은, 성막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이루어질 죄 사함의 역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본질상 죄인과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이는 사람이 돼지와 함께 거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성막을 통해서입니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또 이를 통해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성막을 사랑하시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임하시는 것은, 이제 이 성막을 통해서 죄 사함의 길을 열어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중보자 모세를 통해서만 겨우 간신히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제사장과 정해진 제사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여러 번 나아가 죄 사함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누가 성막의 기능을 합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거하시매` 라는 단어가 영어로 tabernacle로서 `우리 가운데 성막을 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 안에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영광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장막을 치시고 아예 함께 사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막으로 임시 거처를 삼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셨을까요? 바로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막으로 임시 거처를 삼지 않으셨다면, 한 사람도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고, 구원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신성과 영광이 충만해서, 도무지 죄인들이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체를 성막 삼으시고, 죄인들과 함께 거하신 것은 말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장막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성소 휘장이 두 조각으로 찢어졌습니다.

이로써 이제는 누구든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마음껏 교제하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더 자주,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난 여름 수양회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얼마나 큰 영광을 보여주셨습니까?

앞으로 더욱 수양회 때마다, 금요 기도회와 토요 제자모임, 그리고 주일 예배에서 주님을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를 때에는 나아가고, 성막에서 떠오르지 아니할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며칠이고, 심지어 한 달이 되어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36-38). 이제 이스라엘의 진출입은 철저히 하나님께 달려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명 “하나님의 걸음마”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훈련을 통하여 깨우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길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결정하십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조급합니다. 구름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는데도 앞서서 가고자 하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방향만 올바르면 가기는 가지요. 하기는 하지요. 또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이미 모든 계획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결혼의 계획, 자녀의 계획, 취직의 계획, 목자교수의 계획, 역사의 계획, 선교사의 계획 등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13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 나온 후 광야 길을 갈 때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 1㎞ 앞서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막이 행진하는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내주하시면서 함께 가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가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때, 후회함이 없는 가장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주제는 처음 1강에서 배운데로 “부재에서 임재로” 또 “앎에서 섬김으로” “예속에서 예배로”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1,2장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버려진 채, 바로에게 예속되어 고달픈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내일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시고, 간섭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빼오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ammi)으로 삼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으로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임재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happy-ending으로 끝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우선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많이 계시하셨습니다. 이름으로도 계시하시고, 열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는 사건과 광야생활을 통해 수많은 이적으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삭을 얻고, 이삭을 드리는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아는데서 이제는 예배하고 섬기는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습니까? 혹시 나의 꿈과 이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의 썩어질 몸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모든 모임과 역사 속에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더욱 더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겨야 합니다. 둘째, 철두철미하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두가지를 잘 지키는 가운데 모든 문제를 해결받고, 여호와의 임재의 영광이 언제나 충만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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